
“인공지능(AI)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
독일 방위산업(방산) 벤처 헬징(Helsing)의 사훈이다. 독일 뮌헨에 소재한 이 기업은 첨단 드론을 만들어 우크라이나에 한 달에 1000대 정도 수출하고 있다. HX-2 전투 드론의 경우 사거리가 100㎞ 정도이고 최대 시속은 220㎞다. AI를 탑재한 무게는 12㎏으로 탱크나 건물 파괴용 폭탄을 싣고 적진으로 들어가 정밀폭격이 가능하다.
미국 공백에 방위력 키우는 EU
방산 기업 시총 늘고 호황 구가
회원국 중심 시장 분절 극복해야
지난 6월에는 전투기 자율 조종에도 성공했다. 인간 조종사의 평생 비행시간은 보통 5000시간이다. 반면 AI는 3일 만에 수백만 시간의 조종 기술을 배워 스웨덴 전투기 ‘그리펜(Gripen E)’을 조종할 수 있었다. 자율주행차처럼 조종사는 부조종석에 앉아 백업 기능만 수행했다. 헬징은 5년 안에 AI가 조종하는 전투기를 현장에 배치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
헬징의 기업 가치는 창립 4년 만에 120억 유로(약 20조원)로 급증했다. 이처럼 유럽의 여러 방산기업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다만 국가별로 시장이 분절화했고, 재정 투입 대비 경제 성장 효과는 작다는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방산업체의 호황은 주가에 그대로 반영된다. 독일의 최대 방산업체 라인메탈(Rheinmetall)은 포탄·탄약과 장갑차 등을 생산한다. 독일 각지에 6개 공장이 있고, 헝가리와 스페인 등 해외에도 5개 공장이 풀가동 중이다. 또 우크라이나에도 신규 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기 전까지 이 업체는 무기 수요가 많지 않아 생산 시설을 대폭 줄였으나 전쟁 발발 후 설비를 크게 증설했다.

올 초 라인메탈의 시가총액은 270억 유로(약 45조원)에 불과했지만 이달 초 800억 유로(약 136조원)로 3배 가까이 폭증했다. 미사일과 레이더 등을 생산하는 프랑스의 탈레스(Thales)도 이 기간에 시가총액이 2배 넘게 증가했다.
유럽, 국방비 GDP 3.5%까지 늘리기로
유럽 각국이 국방비를 증액하면서 영국을 포함한 유럽연합(EU) 27개국의 무기 구입액이 올해 처음으로 미국을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올해 유럽은 1800억 달러(약 265조원)를 무기 구입에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2021년보다 두 배 더 늘어난 액수다. 올해 미국의 무기 구입비는 1700억 달러(약 250조원)가 조금 넘을 것으로 보이고, 4년 전과 비교해 소폭 늘어났을 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종전 시기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지난 6월 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서 유럽 각국은 2035년까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현재의 2%에서 3.5%까지 증액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더해 국방 관련 인프라에 1.5%를 쓸 예정이다.
이 전쟁이 멈춘다 해도 유럽은 계속해서 국방비를 확대 지출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안전을 보장해왔던 미국이 점차 역할을 줄일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유럽은 자주국방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유럽 방산업체에 호재만 있는 게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여전하다.
유럽 각국이 국방비를 증액해도 방산시장은 기본적으로 회원국 중심으로 분절돼 있다. 범유럽 시장으로 통합돼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는 유럽 차원에서 전력을 보강해 중복 투자를 줄이고 시장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안보 상황은 이런 취약성을 파고 든다. 만일 러시아가 유럽을 다시 침략한다면 유럽의 NATO 회원국은 5조의 ‘집단방위조항’에 따라 함께 군사 개입해야 한다. 범유럽 차원의 방위산업 강화가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하나의 방산시장이 있어야 규모의 경제도 가능하고 무기 가격도 낮아지며 경쟁도 더 치열해진다. EU 차원에서 하나의 방산시장 형성 노력은 이제 첫걸음을 뗐다.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는 1500억 유로(약 254조원)의 유럽 방위력 증강 기금을 조성 중이다. 집행위원회가 국제자금시장에서 최우량 신용등급을 기반으로 30년 만기 단일 유로채권을 발행한다.
최소 2개 이상의 EU 회원국이 무기를 공동 구매할 경우 이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회원국 공동의 방공망 구축과 미사일 구입, 사이버전, 드론전과 반드론전 등에 지원된다. 공동자금을 사용해 공동의 방위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EU는 2020년 코로나19 때에 8000억 유로(약 1356조원)의 단일채권을 발행했다. 국방비 증액을 위해 이번에도 단일채권을 발행하기 때문에 유럽 차원의 재정통합이 진전되는 효과도 생긴다. 공동기금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방산벤처에 특히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방비 지출의 승수효과, 1 밑돌아
방위산업의 호황은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만 단기적 효과는 크지 않다. 국방비 지출의 승수효과는 평균 1을 밑돈다. 1유로를 투자하면 얻는 게 1유로가 안 돼 단기 경기부양책으로는 적절치 않다. 이 때문에 유럽중앙은행(ECB)은 최근 보고서에서 국방비 지출이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을 촉진하려면 선(先) 현금을 지출하고 생산성을 제고하는 연구·개발(R&D)에 집중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중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것은 국방비 증액보다 교통 인프라와 에너지 전환, 교육 투자가 더 높다. 런던정경대(LSE)의 파울로 수리코((Paolo Surico) 교수는 방위비 지출이 R&D에 집중 투자될 경우 GDP 1%에 해당하는 추가 국방비 증액이 장기적으로 2% 경제 성장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2024년 기준으로 EU 27개국은 국방 R&D에 GDP의 0.04%를 지출하지만 미국은 0.62%를 지출해 격차가 크다. 방위산업의 경제 성장 기여를 높이는 것은 국방비 지출의 지속성을 확보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EU의 방위산업은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국방비 증액이 가져다 준 특수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시장 통합과 R&D 확대라는 본질적 과제를 숙고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