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웹툰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만 소비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가 없던가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읽을거리가 더해진다면 훨씬 더 재밌을 지 모릅니다. ‘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는 이야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영화 <하얼빈>과 범주적 사고의 오류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인해 많은 동지들이 희생됐으니 더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함경북도 두만강. 한겨울 꽁꽁언 강바닥 위로 한 남자가 삭풍을 맞으며 걸어간다. 끝도 없어보이는 허연 강바닥. 그는 마침내 쓰러진다. 이대로 끝인가. 그런데 눈을 감기 직전 불연듯 떠오르는 것이 있다. 전투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내 목숨은 죽은 동지들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을 알았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어디론가 걸어간다. 그가 깨달은 것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을 유린하는 일본 늑대의 우두머리인 ‘늙은 늑대’를 제거하기로 한다. 늙은 늑대가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시켰던 이토 히로부미다.
<하얼빈>은 <영웅>과 다르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다. 영화는 1908년 신아산 전투부터 이토를 사살하는 1909년까지 2년간의 이야기를 주목했다. <하얼빈>은 2년 앞서 개봉했던 <영웅>과도 느낌이 다르다. 우 감독은 “내가 그리고 싶었던 안중근은 ‘영웅 안중근’이 아니었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 하얼빈까지 가는 여정 속 고뇌와 번뇌, 두려움, 고독, 쓸쓸함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살아돌아온 안중근을 놓고 독립군들이 심각하게 대립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한의군 부총장 이창섭은 한달여 사라진 참모중장인 안중근에 대해 “살아 돌아온다면 왜놈에게 잡혀서 밀정이 됐을 것”이라며 의심한다. 대한의군 총장 최재형은 “어떠한 이유라도 안중근을 두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안중근은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40여일전 함북 신아산. 대한의군은 일본군을 급습해 혈투끝에 대승리를 거둔다. 수많은 동지들을 잃고서 거둔 전과였다. 남은 것은 포로로 사로잡은 일본군들을 처리하는 것. 독립군들은 무릎을 꿇은 일본군 모리 다쓰오 소좌의 머리에 총을 댄다. 그때 안중근이 이를 가로막는다. “야만이야!”

안중근은 일본군을 전쟁포로로 석방한다. 동지 우덕순이 “이렇게 풀어주면 왜놈들 죄다 끌어안고 공격할 수 있다”며 극렬하게 반대하지만 안중근은 물러섬이 없다.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를 석방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창섭 “만국공법 천마디는 대포한발에 진다고 했다. 그깟 공염불에 휩사여서 동료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 작정인가.”
안중근 “자네는 사천만 일본인을 모두 죽이는 게 목표인가? 나는 이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는게 목표야”
이창섭 “사천만 일본인을 모두 죽여서 우리나라가 독립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할 것이야”
안중근 “그들을 모두 죽이려 들면 우리도 모두 죽는다는 것을 자네는 진정 모르는 것인가”
결과는 혹독했다.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은 모리 소좌를 앞세워 반격하고 대한의군은 궤멸 위기에 처한다. 안중근은 전쟁 중인 현실과 동떨어진, 너무나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을 했던 것일까.
‘전투’에서 이겼다고 ‘전쟁’에서 이긴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는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패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무력대결에서도 이겨야 하지만 동시에 제3자의 동의와 여론의 지지를 받을 명분과 윤리도 필요하다. ‘적 섬멸=전쟁 승리’로 도식화했다가는 ‘범주적 사고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범주적 사고의 오류(category mistake)란 개념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대상을 혼동해 논리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오류를 말한다. 즉 특정 개념이 속하지 않는 범주에 배치하거나 다른 속성을 가진 것들과 똑같이 취급할 때 발생한다. 철학자 길버트라일(Gilbert Ryle)가 소개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영국 옥스퍼드에 들러 “옥스퍼드 대학이 어디있나요?”라고 묻는다면 현지 사람들은 뭐라고 답할까? 그들은 어쩌면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옥스퍼드대는 하나의 캠퍼스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건물, 도서관, 연구실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 대학을 캠퍼스안에 모여있는 교육, 혹은 연구집단이라고 범주화했을 때 발생하는 범주적 사고의 오류다. 미국의 IT기업 애플도 마찬가지다. 애플의 건물들은 미국 산호세 곳곳에 흩어져 있다. 산호세의 한 건물 앞에서 “애플이 어디있나요?”라고 물으면 “여기가 애플인데요”라는 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뇌는 새로 받아들인 정보를 기존에 갖고 있던 기준으로 분류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새 정보를 빠르고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장점이 있지만 새로운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범주적 사고의 오류의 대표적 사례로 오리너구리가 손꼽힌다. 부리는 조류인 오리를 닮았지만 몸은 포유류인 너구리와 닮았고, 발은 조류인 오리를 닮았으면서 꼬리는 포유류인 비버처럼 넙적하고, 새끼는 조류처럼 알을 낳는 이 생명체가 발견됐을 때 사람들은 존재를 믿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오리와 다른 동물을 합친 박제를 갖고와서 조작질한다”고 비난했다. 오리너구리는 호주에서 생포됐고, 그제서야 존재를 인정을 수 있었다.
총탄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죽기 아니면 살기다. ‘아군’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죽여야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전투에 이겼다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 비인도적이고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했다면 역풍이 불어 향후 전세가 나빠질 수도 있다. 아무리 격한 전쟁이라도 비무장한 민간인과 전쟁포로의 학살, 대량살상을 가져올 수 있는 생화학무기, 열압력탄 사용 등을 자제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부총장 이창섭은 일본군을 모두 죽이는 것이 곧 독립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명이라도 일본군을 살려준다는 것은 그에게는 배신의 행위였다. 하지만 안중근의 생각은 달랐다. 이 전투에서 이긴다고 곧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의군이 만국공법을 준수하며 정당한 저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인과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이 ‘대한의군 참모총장’임을 강조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아시아를 공략하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우두머리임을 강조한다. 결국 안중근의 의거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가 아니라 적군의 수장을 제거하기 위한 정당한 군사적 활동이라는 얘기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칭한다는 일본 극우들은 ‘범주적 사고의 오류’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다.
‘범주적 사고의 오류’는 변화 시대 경계해야할 논리적 오류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을 억지로 기존의 범주에 넣어 해석하려다 자칫 큰 판단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비트코인이 처음 출연했을 때도 그랬다. 금융전문가들은 비트코인에 대해 “가상통화는 담보와 실물이 없어 자산가치가 없다”며 “암호화된 데이터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가상화폐는 범죄로 가득 찬 사기다”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비트코인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곧 붕괴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판단은 비켜나갔고, 거래시장은 갈 수록 커졌다. 결국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을 가상화폐 수도로 만들겠다”며 비트코인 비축을 선언했다. 금, 달러와 같은 자산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말미, 안중근을 집요하게 뒤쫒는 모리 소좌에 붙잡혀 죽음을 맞게된 대한의군 부총장 이창섭은 말한다. “안중근은 네놈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고결한 인간이라는 것, 네놈도 알고 있었구나.” 포로석방을 놓고 안중근과 충돌했던 이창섭 부총장이지만 그 역시 근본적으로는 안중근식 방법에 동의를 하고 있었다.
뉴라이트는 틀렸다
독립군들은 일제와는 다른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세계국가를 한반도에 세우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독립투사들의 계속된 투쟁은 대한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세계인에게 각인시켰다. 1944년 11월 22일 마침내 승전국들은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해방시키고 독립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유명한 카이로 선언이었다.
‘광복은 일본군을 무찔러 얻은게 아니라 연합국들이 준 시혜’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있다. 이같은 주장은 종종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의 가치를 폄하하는 논리로 이용된다. ‘전투승리=전쟁승리’로 생각하는 ‘범주적 사고의 오류’에 빠져 있는 대표적 사례로 기억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