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독식 87체제가 국가 위기 불러…민심 반영하는 정치로 공동체 붕괴 위기 딛고 미래로 나아갈 필요
최악 ‘내란 사태’가 증명한 현주소…권력 나누고 협치 가능한 새 질서 세워 국가 소멸 막고 희망 찾아야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헌법을 고치려 하는가? 왜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한마디로 나라를 바꾸고 삶을 바꾸기 위해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나라와 국민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헌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나라 만들기 못지않게, 사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다.
헌법과 나라와 삶, 이 세 가지는 불가분의 연결성을 갖는다. 전체 차원에서 이 셋은 뗄 수가 없다. 이때 헌법은 단순한 텍스트와 조문을 넘어 국민이 합의한 규범과 체제로서 헌법을 말한다.
본시 헌법은 나라, 공화국, 정체, 정치, 체제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이 말들의 앞에는 간혹 ‘국민이 만든’이라는 긴 설명이 들어가기도 했다. 따라서 그 나라가 어떤 형태와 성격의 나라냐는 것은 그 나라의 체제와 헌법을 보면 된다. 또 국민들의 삶이 어떤 삶이냐는 것은 그들이 어떤 성격의 나라에서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정치가 더 안정되고 정책이 연속성을 가지고, 다른 어떤 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체제와 정치에 달려 있다. 어떤 나라의 정치는 타협지향적이고 연립이 가능한데, 다른 어떤 나라는 왜 갈등지향적이고 연립이 불가능한가도 마찬가지다. 나라 간에 정치가 다른 이유는 다른 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에 의해 통제받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나 일탈과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인간들이 크고 작은 단위의 통치를 시작한 이래 반드시 일정한 형태의 제도를 갖춘 까닭이다. 인간들의 본성, 특히 능력과 한계, 야망과 욕망은 어디서나 거의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냐 제도냐 하는 논쟁처럼 불필요한 것도 없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좋은 나라와 좋은 정치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그것을 채우는 충분조건이 사람인 것이다. 특히 근대로의 전환을 전후해 헌법을 포함한 일련의 법제를 통해 통치자를 제어하기 시작한 이유는, 비범한 통치자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중에 지도자가 나올 수 있다는 기본 전제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평범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더라도 크게 실패하지 않을 장치의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더 다원적이고 복잡해지는 데 반해 점점 더 작고 더 무능하며 더 파당적인 지도자들이 배출되고 있는 한국 현실에서, 최고 권력자 한 사람이 아직도 막강한 권력을 헌법적·제도적으로 보장받는 점은 지극히 불합리하고 위험한 상황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과 대표들의 최대 직무유기는 한마디로 헌법개혁의 방치라고 할 수 있다. 진영을 넘어 연합과 연립, 공존과 상생이 가능한 헌정체제를 만들지 못한다면 한국호의 미래는 정녕 불투명하다.
한국 사회가 이토록 국가발전을 이룬 상황에서 그에 정반대되는 대통령제 리스크와 대통령 리스크를 모두 안고 갈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는 이번 12·3 내란 사태를 경과하며 이 두 요인이 만났을 때 나라가 얼마나 심각한 분열과 내란충돌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지를 체험한 바 있다.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권력분립을 소리 높여 주창한 선현들은 경고한다. 인간들은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기 전에는 결코 기존 관행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실제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간들은 최악의 유혈혁명과 사태를 겪은 뒤에서야 기존 악폐를 변경했다.
지난 박근혜 촛불탄핵 당시 적폐청산이냐 탄핵연대냐의 기로에서 필자는 후자를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보수의 탄핵 동참으로 인한 광범한 탄핵연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 호기를 놓친다면 ‘더한 것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탄핵연대를 통해 연립·연합·통합정부를 수립한 뒤, (탄핵연대로 형성된 개헌연합에 기반해) 헌법개혁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폐청산을 위해 검찰과 연대한 결과는 헌법개혁과 검찰개혁의 이중 실패를 넘어 끝내 검찰정권 등장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번 윤석열 내란 사태는 87년체제로 통칭되는 오늘의 한국 헌정체제가 부정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였다. 헌법과 주권, 국가와 국민이 정면으로 도전받은 무장내란을 당한 뒤에도 헌정질서에 대한 근본 수술과 개혁을 미룬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과 상례에 반한다. 더 이상의 부정적 최악 상황을 맞을 각오가 아니라면 이제 헌정체제의 근본적 개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우리 모두의 통절한 성찰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제 막 최악의 상황을 간신히 통과한 시점이다. 따라서 아직 직전 사태에 대한 두려움과 반성이 남아 있고, 또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갈 희망이 있는 상태에서 미래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훗날 되돌릴 수 없는 좌절과 절망에 빠진 시점에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이미 세계는 그러한 실례를 너무 많이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국은 잘못된 체제와 잘못된 정치의 실질적인 결과를 보노라면 지금도 사실 크게 늦었다. 자살·저출산·지방소멸·기후생태·사교육과 같은 국가의 핵심 공통 의제는 거의 포기나 절망, 또는 장기간 최악 상태에 빠져 있다. 다만 서로 최악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해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법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근본적으로는 좋은 해법을 연속해 잘 실현할 수 없는 체제와 정치 때문이다. 진영의제가 아닌 공공의제는 격렬하게 말로 논쟁만 할 뿐 실제로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거나 더욱 악화된다. 저출산·자살·지방소멸·기후생태·비핵평화 의제를 보라. 진영의제에 비해 더 많은 관심과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공공의제의 기포화·기체화로 인한 증발을 말한다.
실제로 이 중 어떤 문제는 벌써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며 세계 최악 수준이다. 어떻게 이렇게 한 나라의 인간문제 지표가 거의 동시에 세계 최악 수준일 수 있는지 아연 송연할 따름이다. 필자는 이들 탈진영적 공통 의제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해결의 공통 단초라도 만들기 위해 어떻게든 연립과 연합, 협치와 타협이 가능한 헌정체제를 만들자고 오랫동안 호소해왔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헌법개혁의 이유는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의 생존과 보존을 위해서다. 모든 자원을 총동원한 생사투쟁 대결로 인해 매 5년에 한 번씩 - 최근 두 대통령을 보면 그조차 아예 4년, 또는 2년 반으로 줄어들었다 - 권력과 정권교체를 따라 국가비전과 정권의제와 국정방향이 완전 급변침하는 상태에서 공동체와 국가, 사회와 국민이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받기는 어렵다. 현행 승자독식 권력구조는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갈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여놓았다. 따라서 모든 걸 다 걸고 권력 장악을 위해 싸운다. 전부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것은 권력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투표 → 대표 → 정부 구성에서 민심 그대로 반영될 때 갈등이 가장 낮다. 최소한 비례적 반영일 경우에도 갈등은 현저히 낮아진다. 일반적으로 비례성과 대표성과 민주성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대통령 선거의 경우 선진민주국가 중 최악의 불비례성을 보여준다. 득표율은 낮으나 권력은 독점하기에 극심한 불비례성과 최악의 갈등이 만나는 근원 역할을 수행한다. 불비례성은 의회 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 둘 다 압도적인 사표의 존재와 불비례성으로 인해 민심은 투표 → 대표 → 집행부로 갈수록 왜곡된다.
그러나 민심 그대로를 반영하게 되면 나의 의견은 최소한이라도 항상 반영된다. 즉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다. 참민주공화국이 되는 것이다. 현재는 최소한 절반은 사표가 되어 반주주의(demicracy·半主主義)에 머물러 있다. ‘비(非)대의민주주의’를 포함해 오늘날 반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불리고 있다. 반주주의 체제에서는 심할 경우 5년은 시민·국민이 아니라 특정 진영과 정파의 정치 부족과 진민(陣民)으로서 거리에서 투쟁만 할 수도 있다. 국민과 시민을 더 이상 거리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사와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정부 구성과 선거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이유다.
더 큰 문제는 절반 이하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권력은 독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권력과 정권과 대통령은 잠시 들고 나면 되지만 절반 이하 국민의 지지를 받은 그들이 5년간 좌지우지하다 떠난 대한민국 공동체와 국민은 보존되고 영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정권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되었다. 이미 자살·저출산·지방소멸 문제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권력과 정권의 영향력이 바르게 행사되지 않는 국가와 국민의 영역에서 대한민국은 급속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정권과 지도자를 합의된 민주적 헌법적 공통 가치와 질서 내로 제어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공동체는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렵다. 권력과 정권을 국가·주권·국민과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는다면 후자의 영속은 불가능하다.
특히 지지하는 인물과 진영을 따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증오하면 안 된다. 그럴 때는 정치적 부족민과 진영민이 될 뿐이다. 반대로 그것을 가로지르는 시민·연대·연립·상생이 외려 나라·국가·헌법·체제의 뜻에 완벽히 부합한다. 다양한 신분과 계층, 집단과 지역을 연합한 혼합정부와 연방체제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생존한 이유는 분명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형태를 민주공화국, 특히 의회책임제와 연립·연합정부에서 본다.
어떤 헌정체제와 제도가 더 나은지는 오직 현실에서만 검증받을 수 있다. 실제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을진대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어느 하나가 더 좋다고 증명되었다고 해서 특정 국가에 곧바로 채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민과 대표들의 합의와 선택 과정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국민 1인당 GDP, 민주주의, 인권, 자유, 평등, 삶의 질, 삶의 만족도, 복지, 분배, 성평등, 갈등지표, 시민참여를 포함한 국가 전체의 발전과 개인 삶의 여러 측면에서 의회책임제가 대통령책임제에 비해 더 나은 지표를 보이는 것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공공사회지출, 정부 신뢰, 여성의원, 실업률, 상위 10% 소득점유율처럼 구체적인 부문의 수치도 마찬가지다.
이 점은 거의 모든 집합적 비교지표의 공통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지표는 압도적으로 전자가 더 낫다. 물론 평균이 모든 개인의 공통 지표는 아니다. 그러나 평균은 분명 전체의 차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개인의 차이를 당연히 포함한다. 그러나 대통령책임제가 더 나은 지표를 보이는 부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고르게 잘살고 싶으면 권력구조를 분산·분권하는 방향으로 개혁하면 된다. 자주 강조한 대로 나라가 개인이며, 제도가 삶인 것이다. 공화국의 최초 근대어가 ‘모두의 공통 복리’(commonwealth)라는 뜻을 갖는 것은 매우 뜻깊다. 여기서 복리는 행복과 이익을 모두 포괄한다. 우리가 권력구조를 포함한 제도를 바꿔야 할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국가권력이 자원 배분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대통령책임제가 내각책임제보다 경제발전 및 복지 수준에서 더 나쁘다는 위의 경험적 지표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기득세력과 기득이익은 권력을 장악한 최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포진한다. 따라서 권력과 권한이 분산되면 자원도 분산되며, 당연히 기득세력의 기득이익과 자원은 일반 시민들에게 나눠진다. 거시적으로 볼 때 여기에서 예외는 거의 없다. 즉 권력 분산의 정도와 자유 및 평등 지표는 거의 비례한다. 인류사에서 자유와 자원이 극도로 불평등한 국가들이 혁명에 직면했을 때, 일반 민중들이 경제권력보다는 국가권력을 타파·교체한 연유였다.
인류는 오랫동안 ‘완벽한 공화국’, ‘완전한 나라’를 꿈꿔왔다. 공교롭게도 이런 표현은 인류 정치사상의 최고봉에 도달한 사람들의 주장에 공통으로 들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자유공화국·민주공화국 관념과 이론을 제공한 최고 이론가들은 거의 모두 그러하였다. 즉, 현실의 정치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또 외려 그러하기에 인간들은 결코 완벽한 나라를 향한 비전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완벽한 공화국에의 꿈을 이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사용한 사람들은 이상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현실주의자들도 아주 많았다.
현실에 대한 변화의 추구는 반드시 더 나은 현실을 만들기 위한 이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인류 최초의 성문헌법을 통해 첫 민주공화국을 만든 선현들은 앞선 이들의 주장을 정밀하게 검토한 토대 위에 아예 ‘더 완벽한 공화국’(연방)이라는 언명으로부터 출발한다. 무장내란이 보여주었듯 87년 헌정체제는 이제 조종을 고했다. 반드시 고쳐야 한다.
어떤 헌법도 제도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와 삶을 동시에 바꾸기 위한, 더 나은 새 민주공화국을 향한 여러 경로 중의 하나로서 헌법을 개혁해야 하는 과업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좋은 나라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