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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평화 시위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 한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미주 한인들은 어려운 환경 즉 저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 그리고 인종 차별 등의 악조건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 평화 시위 소식은 미주 한인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3.1 운동은 미주 한인여성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 운동의 보조에서 주체로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장 이대위는 1918년 1월 21일 여성 동포들의 국민회 입회를 허락하는 훈시를 발표하였다.
“남녀 제한 없이 모두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갖는 회원으로 입회하는 것”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여성 동포들의 입회가 허락되자, 각 지방회에서 여성 동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도 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차만재 교수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지방의 한인들이 3.1 운동 소식을 접한 후 여성들의 독립 운동 참여가 활발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1) 5월 18일 한인 여성 대표들이 회의를 했다, 2) 전국 한인 애국여성 리그 설립, 3) 대한부인구제회 다뉴바 지방회 설립, 4) 일본 간장 불매 운동, 5)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도록 미 의회에 로비, 6) 한인 학생 회의가 8월 14~16일 개최됐다고 요약하고 있다.
3.1 운동 이후부터 애국 부인단은 외교 활동도 벌였는데 부인 애국단이 미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의 서두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것을 치하하면서 한인들은 비무장의 혁명을 일으켰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일인들의 만행도 지적했는데, 한국 부녀를 겁탈했고 예수교를 위협한다고 전했다.
‘무삼 방책으로든지 도와주시기를 꾀하시면 각하께서 능히 오늘 넓은 세계가 다 아는 일본의 큰 죄악을 교정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마지막 발언에 이 글에 핵심이 들어있다. 이 청원서는 은근히 미합중국 대통령을 세계의 리더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이며 리더로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즉 세계의 악인 일본에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왜적의 장을 먹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김자혜, 리신환, 량제현은 고추장과 간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새크라멘토 지역 부인들은 합자해서 간장회사를 조직하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리버사이드 지역의 한인 여성들도 집에서 간장을 직접 만들어 먹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에 동참했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이처럼 각 지역의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간장, 고추장, 토장 등을 직접 만들거나 한인 회사를 설립하여 판매한 것이다.
3.1 운동 직후 미주 한인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첫째,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정식 입회가 1918년부터 허락되었고, 둘째, 부인애국단과 대한부인구제회 등의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셋째,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넷째,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차세대들에게 알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에서 2025년 주요 사업의 일환으로 차세대 교육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