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리그 레전드이자 팀에서 12년이나 뛴 간판선수를 보내는 뒤늦은 은퇴식 치고는 너무 콘텐츠가 약했다. 한 배구인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행사였다”고 아쉬워했다.
현대캐피탈은 지난 27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대한항공과의 홈 경기를 앞두고 ‘여오현 은퇴식’을 열었다. 여 코치는 2023~2024시즌이 끝난 뒤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사였던 김호철 IBK기업은행 감독의 부름에 2024~2025시즌부터는 ‘여자부’ 기업은행 코치로 지도자 커리어를 쌓는다. 오랜만에 현대캐피탈 팬들 앞에 선 여 코치는 “팬여러분과 동료, 그리고 훌륭한 팀이 있어서 지금 제가 있을 수 있었다”며 “12년간 운동복을 입고 체육관에 입장하다 평상복을 입고 마이크를 잡으니 이제야 은퇴가 실감난다. 좋은 추억들 기억하고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프로스포츠의 ‘레전드 은퇴식’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했다. 경기 직전 10분 남짓 진행된 짧은 행사였다. 행사가 잘 알려지지 않아선지 관중석은 절반 정도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애초에 성대하게 기획된 은퇴식이 아니었다. 현대캐피탈은 여오현 은퇴식과 관련해 보도자료도 내지 않고,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만 간단히 공지했다. 별다른 이벤트도 없었다.
사실 여 코치가 은퇴하는 과정에서도 현대캐피탈은 레전드 대우는 조금 아쉬웠다. 여 코치의 은퇴는 현대캐피탈의 공식 발표가 아닌 기업은행의 코치 영입 보도자료로 알려졌다. 이날 은퇴식은 은퇴 후 5개월이 지나 이미 기업은행 코치로 새 시즌을 맞이한 뒤에야 열렸다. 이날 여 코치의 현역 시절 현대캐피탈의 사령탑이던 김호철 감독과 최태웅 SBS스포츠 해설위원도 함께 자리했지만, 구단의 초청이 아닌 자발적인 발걸음이었다.
여 코치는 2000년부터 프로에서 뛰면서 삼성화재, 현대캐피탈의 전성기를 이끈 대한민국 배구를 대표하는 리베로였다. V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만 9차례 우승하는 대기록도 남겼다. 삼성화재에서 뛰다가 2013년 자유계약선수(FA)로 현대캐피탈로 이적했고, 2015년부터는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최정상에서 기량을 유지하며 “45세까지 뛰겠다”던 여 코치는 ‘45세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사실 V리그 구단들이 준비했던 은퇴식 행사 대부분도 화려하지 않았다. “우리 구단들이 딱 그정도만 한다. 다른 프로스포츠와는 비교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그렇지만 현대캐피탈이 최근까지 성적과 마케팅을 모두 잡으면서 V리그 배구 트렌드를 리드한 ‘명가’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더 짙다. 현대캐피탈은 대한민국 프로스포츠에서 지역 연고 마케팅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는 구단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성적에만 집중할 뿐, 팬서비스와 마케팅 등에 소홀해졌다는 평가가 없지 않다. V리그 레전드 여 코치를 보내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한동안 V리그 우승 경쟁에서 멀어져 있던 현대캐피탈은 이번 시즌 대한항공과 ‘2강’으로 꼽히고 있다. 이날 대한항공전에서 승리하며 개막 3연승으로 선두를 달리며 ‘명가 재건’의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이날 여 코치의 은퇴식은 ‘옥의 티’로 남았다. 한 배구계 관계자는 “현대캐피탈 같은 명문팀이라면 팀에 헌신한 선수들을 예우하며, 팀원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오현에게 조금 더 명예롭고, 팬들과 호흡하는 은퇴식 무대를 만들어줬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