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지역화폐론자인 데이비드 보일이 2011년 국제지역화폐연구저널(IJCCR) 15호에 쓴 글의 첫머리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한적한 마을의 모텔에 여행객이 찾아와 100달러 지폐를 내고 묵을 방을 둘러보겠다고 하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새 모텔 주인은 정육점에 빚을 갚고, 돼지농장주와 협동조합 직원, 매춘부가 순차적으로 외상값을 갚으면서 100달러는 순식간에 모텔로 돌아온다. 하지만 여행객은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100달러를 다시 챙겨 떠난다는 내용이다. “아무도 어떤 것을 생산하지 않았고 아무도 돈을 벌지 못했지만, 마을은 빚에서 벗어나게 됐고 미래를 보다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이재명 “승수효과 모르는 바보들”
지역화폐 통한 지출 확대 예고
비기축통화국, 나랏빚 관리 필수
이 이야기가 2014년 한 진보 성향 연구소 홈페이지에 소개됐다. 100달러가 10만원, 모텔이 호텔로, 매춘부는 마을 사람으로 바뀐 정도다. 오마이뉴스 보도를 보면 이 글을 토대로 지난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호텔경제론’으로 불리는 그림이 제작됐고, 당시 성남시장이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한동안 주목받지 않다가 이 후보가 지난 16일 군산 유세에서 언급하고,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TV토론에서 집중 공격하면서 화제가 됐다.
비슷한 일화는 대공황 시절에도 있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회자됐다. 심지어 100달러가 위조지폐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글을 쓴 보일은 이 이야기는 “경기 부양책에 대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돈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돈이란 바로 지역화폐다. 보일의 일화에선 여행객의 100달러로 마을의 빚과 외상 매출을 청산했으니 적어도 신용경색을 해소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지역화폐의 필요성을 강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후보의 호텔경제론 그림은 빚을 청산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호텔, 가구점, 치킨집, 문방구가 연쇄적으로 물건을 주문해 결제하고 최종적으로 문방구가 호텔에 외상을 갚는 방식으로 변형됐다. “마을에 들어온 돈은 없지만 돈이 한 바퀴 돌면서 마을 상권에 활기가 돈다.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이 가져다주는 경제 활성화입니다”라는 설명까지 붙었다. 그런데 이 그림만으론 기본소득이 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지역화폐에 기본소득이 연결되고, 물건을 주문하고 결제하는 사례가 포함되다 보니 TV토론에선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승수이론으로 논쟁이 확대됐다. 승수이론은 10만원을 정부 지출로 돈을 투입하면 연쇄적인 소비로 전체 소득이 20만원이나 30만원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승수이론을 설명하는 사례를 봐도 마지막에 예약 취소는 없다. 그러니 이를 ‘노쇼 경제학’이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패러디까지 나왔다. 단순히 생각해도 호텔이 걱정되지 않나. 돈이 돌아야 경제가 잘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지만, 예약 취소를 해도 활기가 돈다는 부분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후보는 지난 21일 “승수 효과를 모르는 바보들이 있다”고 공세를 폈다. 중요한 것은 호텔경제론 그림보다 무슨 돈으로 어떻게 돈이 돌게 할 것이냐다. 바보 같다고 혼내고 공격할 게 아니라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후보 쪽은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며 이를 가능하면 지역화폐로 하겠다고 했다. 이 후보는 지난 21일 유세에서 “나라가 공짜 돈 주면 왜 안 되나. 다른 나라는 국가부채 비율이 110%가 넘는데 우리는 50% 이하다. 나라가 빚 지면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110%를 넘는 나라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선진국 중에선 기축통화국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일반정부 기준)이 올해 비기축통화국 평균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가 발간됐다.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보다 재정이 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만큼 대외신인도에 각별히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나랏빚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을 못하는 기회비용이란 게 존재하지 않나. 정부의 재정지출이 소비를 자극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끝없이 공급되는 우물일 수는 없다.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후보라면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정책을 가다듬는 계기로 삼고,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