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더중앙플러스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19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기록 중 팩트가 명확지 않아 후대에 입증되거나 반박된 부분(본문에서 녹색으로 표시), 여러 등장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고 재구성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3화.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조선 요릿집 명월관
명월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요릿집*이다.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명월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때 명월관은 황토마루 네거리(황토현), 지금(1970년)의 세종로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자리에 있었다. 회색빛 2층 양옥으로 된 명월관은 울타리가 없었고 대문은 서쪽으로 나 있었다. 2층에는 귀한 손님들을, 아래층에는 일반 손님을 모시는 것이 상례였으나 꼭 그와 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실이란 이름을 가진 특실의 방이 하나 있어 아주 귀한 손님이나 그윽한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공됐다.
아래층은 온돌이었으나 2층은 마룻바닥에 일부는 양탄자, 일부는 돗자리를 깔았고 겨울에는 숯불을 피운 화로가 방 가운데 놓여졌다.
처음 명월관 주인은 안순환씨. 그는 지금부터 61년 전인 1909년에 명월관을 열었다**. 안씨는 원래 상인이 아니었다. 궁내부 봉임관 및 전선사장으로 있으면서 어선과 철연을 맡아 궁중 요리에 반평생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순종을 모시고 창덕궁에 있을 때 이미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순종에 대한 일인들의 간섭이 너무나 심한 데 분통이 터져 사표를 내고 벼슬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안씨는 명월관을 개업해 궁중 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됐고, 술은 궁중 나인 출신인 분이가 담그는 술을 대 쓰는 바람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분이의 성명은 잘 모르나 그 무렵 그의 술 만드는 솜씨는 상류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이름났었다. 처음에는 약주·소주 등을 팔았지만 나중에는 맥주와 정종 등 일본 술을 팔았다.
이 무렵 융희 3년(1909년)에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발붙일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에는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과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