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범위

2024-11-18

김길웅, 칼럼니스트

사람은 손발이 닿는 어느 반경에서 한정적 삶을 살아간다. 일상을 벗어나지 않아 늘 드나드느니 낯익고 임의롭다. 낯설지 않은 정해진 구도에 몸을 놓으면 심신이 평안하다. 어제 만났던 얼굴과 오늘도 대면할 수 있는 개연성이 마음을 들뜨게도 한다. 일에 진전이 없거나 변화가 없을 때는 그 범위에 갇힌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다고 현실에서 범위의 확산이 손쉽지 않다. 한 걸음 내디디려 하다가도 다니던 길이 익숙해 주저앉기도 한다.

내 범위가 상당히 줄고 좁혀 드는 것 같다. 범위의 축소는 시간도 짧아지면서 머무는 공간도 눈에 띄게 줄고 좁혀 든다. 마치 골목을 나와 고샅을 지나 마을로 뻗어나가던 아잇적 생활의 사회화가 어느 날 맴돌다 골목으로 들어와 갇혀 버리는, 그런 가시적 변화 같은 것일까. 이런 변화를 수용하면서 겪게 되는 감정소모가 적지 않다. 서편 마루에 걸려 있는 저녁 해가 그 시간 그 공간에 머물러 있다 지워지는 그 한 찰나를 바라볼 때처럼 안정을 잃어 가는 작은 잎새같이 흔들리는 수는 왜 없을까.

몸이 멀어지면 정도 얇아진다.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내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손발을 뻗어도 닿지 않은 어느 범주 밖에 있다는 얘기다.

퇴임 이후의 변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 이 과거완 달라진 그들과의 소통이 뜸한 변화인 것 같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더 나가려 해도 더 나가지 못하고, 띄우려 해도 더 띄우지 못 하는 정체된 삶이라 그런다. 이쯤은 예감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처신한다고 애를 쓴다. 삶 자체가 퇴락하니 내가 몸을 부리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가 의당 제한되리라는 지레 짐작에 따라 심신을 편안히 놓아 살면 될 것이다.

내 범위가 줄고 좁혀 드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흔들려선 안되는 것이 내 문학의 주변 추스르기다. 두 군데 글방 강의와 문학 동인 한 군데. 여러 해를 끌어 와서인지 쉽게 놓지 못한다. 놓아 버리면 갑자기 휑할 것 같다. 하던 일을 범위에 가둘 수 없는 것처럼 허황한 게 있으랴. 아침 저녁으로 나눠 진행하는 강의는 세상과 교섭하는 통로다. 서로 주고받는 글로 인생을 공유할 때, 그것에서 향기가 나고 향기는 철학으로 변용돼 울림을 준다는 의미다. 이것만은 놓지 않겠다고 내게 우격다짐하는 이유다.

어느 날, 강의에 가려는 등 뒤로 아내의 목소리가 따라 나섰다.

“여보, 언제까지 해야 돼요?”

등이 굽으니 어깨를 펴고 걸어라 지청구하는 아내다. 그날따라 등이 더 굽어 보여 안쓰러웠나 보다.

“아직 멀쩡한데…. 이것 봐요.”

등을 좌악 젖히면서 한마디 응대하고 문을 박찼다. 내리막 고샅 길을 내리는 걸음이 가벼웠다. 금세 머릿속이 복잡하다. 글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다. 상상을 얹어야 글이다. 안간힘을 쓰지만 별반 소득이 없지만 이어간다.

글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려는 내 삶 자체다. 소홀하거나 어정뜨지 않으려 한다. 내 범위를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유일한 삶의 가치 실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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