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우리네 세상에는 소설 같은 일들이 넘실댄다. 다음 광경은 어떠한가?
1897년 어느날 필립 제이슨(Philip Jasohn)이라는, 국적은 미국이고 직업은 서양의사인 사나이가 조선의 길거리에서 신문팔이를 하고 있다.
“한 장에 한 푼인 신문이오! 읽고 나면 창호지도 되고 밥상 덮는 상보도 되는 신문 한 장에 한 푼이요.”(이규태, <이규태 코너:서재필 정신>, 조선일보 1994.4월5일 5면 / 강준만의 《한국근대사 산책》 제3권 55쪽에서 재인용)
그의 한국 이름은 서재필(1864-1951)이다. 스무 살 때 불끈, 혁명(1884년 말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대역죄인이 되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갔던 그 사람. 그가 다시 조선에 돌아와 독립문과 독립협회를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할 그때 고국에 혈육붙이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죄다 처형당했기에. 전라도 보성이 고향이며 미국 여자를 아내로 둔 이 의사는 자신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지금 길거리에서 목청 높여 팔고있이다. 신문을 직접 우리의 눈으로 보기로 하자.
1899년 3월 15일(수) 자 제55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기사 맨 위 제호 아래쪽에 ‘각국’, 왼쪽에 ‘명담’이라 적혀 있다. ‘각국 명언’이라는 뜻이겠다.
지금의 우리말로 옮겨 보면:
“법률은 혹 졸기는 할지언정 결단코 죽지는 않는다.”(영국)
“법률이 점점 많아질수록 범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영국)
“법은 부자가 범하고 벌은 가난한 자가 받는다.”(스페인)
그 아래 전면을 가득 채운 글이야말로…감옥의 죄수가 보내온 편지가 아닌가. 그 편지가 1면을 다 채우고 그것도 부족해 그다음 날 1면으로 이어진다. 일간지가 죄수의 편지를 두 날에 걸쳐 전면에 싣고 있는 것 자체가 놀랍지 아니한가?
“신문은 왜 고명하신 명사들의 우아한 글, 벼슬 높고 학식 높은 이들의 고담준론, 사건이나 사고들로만 채워야 하는가. 소리 없이 신음하는 죄수들의 목소리를 실으면 왜 안 되는가?”라고 이 신문은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신문들은 이런 생각을 못 할 것이니 100년 전의 <독립신문>이 더 선진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장문의 진정서를 일부만 불러내 보기로 하자. 요즘의 우리말로 바꾸어 갈무리해 본다.
죄수 정형(情形) ( ‘죄수들의 상황’이라는 뜻이겠다)
“우리는 다 감옥에서 몇 달 몇 해 혹은 종신징역 사는 죄인들이라. 죄의 경중은 고사하고 초로(草露) 같은 인생이 청춘세월을 옥중에서 보내니 천지간 가련한 목숨들이오나 우리도 또한 대황제 폐하의 적자들인 고로…” 감형되어 옥에서 풀려나면
“…그물에 걸린 고기 창해에 든 듯하다. 부모 처자 친척 붕우 반가이 서로 만나 붙들고 눈물 흘리고 고성 문답할 때 반갑고 기쁜 거동 말로 어찌 측량할까? 경사로이 부르나니 만세만세 만만세야 대황제폐하 만만세야. 이리저리 축사하니 이 어찌 나라에 참 경사 아니리오.”
감옥 사정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음을 구체적으로 소명하면서
“정초에 죄수 둘과 미결수 한 명 합쳐 세 명이 닷새 안에 죽었는지라. 외국에서는 미결수가 죽으면 당국에서 배상금을 문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미결수의 생사를 하찮게 아니 이 백성들 불쌍치도 않소이까. 재판 없이 몇 해씩 가두어 두는 옥에 홀로 콩나물 삶은 소금국 두 그릇에…주는 것 바라고 긴긴 해를 보내니…이것으로 목매달고 견디기 진정 어렵도다. ”
새로 부임한 형무소 소장을 완곡하나 뜨겁게 성토한다.
“이번에 새로 온 형무소 소장이 신문을 못 보게 엄금하신다. 책과 신문은 보아도 될 터인데 그것을 금하니 까닭을 알 수 없다. 얼마 전 저녁에 죄수들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한둘이 무슨 소리 좀 했다고 한 칸에 있는 죄수 20여 명을 일제히 족쇄 채우고 칼 씌우니 여러 사람의 말이 좀 심한 일이라 하더라. 조금만 잘 못하여도 형벌을 무겁게 쓴다고들 하더라. 우리 생각에도 관리들이 모두 죄수들을 좀 박대하는 것 같다. 간수들이 예전보다 더욱 심하게 대하고 있으니, 죄수들 마구 대접하는 것은 변한 게 없다. 여기에서 병들어 죽는 사람을 일 년 통계 하면 백여 명이 되니 이 어찌 대황제 폐하의… 금년 동안에 죽은 백여명의 불쌍한 목숨을 생각하여 대강 감옥 사정을 기록하여 보내오니 귀사 신문에 게재하여, 재판 진행 속히 되고 거처와 식사 범절 좀 달리 마련되오면 나라에 만행일 듯하오니 아무쪼록 성의껏 넒고 넓은 덕 베푸시기를 바라나이다.”
한글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들이 가슴 속에 쌓인 억울과 오장육부에 서린 설움을 이처럼 토로할 수 있을까? 많이 배웠다는 양반들에게 언문이니 암클이니 한글이 천대받던 시기에 서재필과 주시경이 처음 순한글 신문을 낸 그 뜻을 무엇에 견주랴. 주시경은 한글 천대를 슬프게 생각하여 “몇 차례고 소리 없는 울음을 울며” 한글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속다짐하였다고 한다.
<독립신문>을 펼친 김에 광고란에 눈길을 한 번 주기로 하자.
‘世昌洋行(세창양행) 제물포’ 광고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금계랍을 이 회사에서 또 새로 많이 가져와서 파니 누구든지 금계랍 장사하고 싶은 이는 이 회사에 와서 사거든 도매금으로 싸게 주리라.
이 얼마나 쉽고 살갑고 경쾌하며, 비계와 굳은살 하나 없는 날렵한 글투인가. 오늘날은 이렇게 광고하지 않을까?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금계랍을 이 컴퍼니에서 재차 신규로 다량 반입하여 판매하니 누구든지 이 메디신을……
왜 이렇게 이물질이 끼고 비계와 굳은살이 붙었는가? 이게 우리의 호흡과 성미에 맞는 글인가? 세종대왕의 뜻에 맞는 글인가? 왜 이렇게 말과 글이 날로, 달로 누추해지고 있는 것일까?
‘금계랍(金鷄蠟)’은 말라리아 치료제 ‘키니네(kinine)’를 말한다. 그 음을 따서 중국인들이 한자로 옮겨 만든 이름이 바로 ‘금계랍(金鷄蠟)’인데 해열제ㆍ강장제ㆍ위장약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여기 광고주 세창양행은 독일 무역상사 ‘Meyer and C’이다. 이 회사는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상으로, 홍콩에 동방 본부를 두고 중국의 상하이와 톈진, 일본의 고베, 한국의 제물포(인천)에 지점을 열었다. 이 회사는 처음엔 바늘, 염료, 옷감 등 생활용품을 판매하다가 나중에는 강철. 약품. 기계. 무기 등을 중계무역했다. 세창양행의 사택이 1884년 인천에 세워졌는데 건평 173평의 2층 벽돌집으로 우리나라 첫 양옥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독자들이여, 제물포의 세창양행에서 도매금으로 물건을 떼어와 서울에서 돈을 번 사람은 누구였을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면 더욱 궁금해진다. 우리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고샬키(Gorshalki), 역시 독일인이다. 그는 1890년대 말 정동에 ‘고샬키 상회’를 열고 모카커피, 건포도, 오트밀, 푸딩, 러시아산 케비어(철갑상어 알), 훈제 연어, 잼, 금계랍, 일본산 석탄을 팔았다. 그는 당시 <독립신문> 영문판에 상품 광고를 냈는데 '갓 볶은 모카 커피(Newly Roasted Moka Coffee)'가 들어있다. 100년여 전의 일인데 오늘날의 모습 같은 착각이 든다. 벌써 19세기 말에 조선 땅에서 누군가는 원두커피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고샬키가 유명해진 일은 따로 있었다. 1900년 1월 어느날 다리 부위에 총상을 입었던 모양이다. 서양의사 여럿이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때 조선인 의사가 홀연히 나타나 탄환을 뽑아내고 치료했음을 1월 26일 자 <황성신문>이 보도하고 있다. 그 명의의 이름은 염진호(廉鎭浩). <독립신문> 1899년 3월 10일 자에는 "남대문 밖에서 약국 하는 렴진호 씨의 의술이 고명하야 환자들이 신효를 많이 본 일은 예전부터 유명했거니와 근래에 각색 양약과 각종 의료기계를 많이 구하여 놓고 환자들을 보아 치료하는데…"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국인 의사의 빼어난 솜씨도 오늘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닌 것 같다.
뒷말: 앞머리에서 인용한 1899년 3월 15일 자 및 16일 자 <독립신문> 사본을 구해 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선정규 박사에게 감사드린다. 기사의 존재는 알았으나 내용을 알지 못해 고민하던 중 선 박사에게 연락하였더니 직접 고려대도서관에 가서 구해 주었다.
40여 년 전 나는 외교부 파견으로 타이페이에서 중국어 연수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 선정규가 먼저 와서 무언가 골똘히 연구하고 있었다. 굴원(屈原,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78년)을 붙들고 있었다. 세상에, 기원전 사람을…하고 속으로 갸웃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친구가 내게 주었던 자기의 책 《장강을 떠도는 영혼》(굴원)의 첫 쪽에서 느꼈던 감동이 아직도 아련히 남아 있다. 벌써 40년이 지났는데.
* 참고한 자료: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제2권 및 3권
황상익, 《근대 의료의 풍경》
<독립신문> 1899년 3월 15일 자 및 16일 자
- 다음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