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회원국 간 화장품 안전성 평가와 성분 시험 기준을 통합하는 '규제조화(harmonization)' 논의를 본격화하는 등 역내 무역 장벽을 낮추고 교역 효율성을 높이려는 국제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은 2009년 서울에 세계 최초의 APEC 규제조화센터를 유치하며 규제 선진화를 선언하는 등 한때 선도적 역할을 했지만 이후 후속 제도화가 지연되면서 점차 주도적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23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국내 화장품 수출액은 85억달러(약 11조9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14.9% 증가했다. 수출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제품 안전성과 시험 신뢰도를 입증할 법적 기반은 여전히 미비하다.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국제 시장 신뢰 확보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문제는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은 "식약처가 지정한 공식 임상기관이 없고 30여 개 민간기관이 감독 없이 인체적용시험을 수행하고 있다"며 "시험 기준과 피험자 보호, 부작용 보고 의무가 정비되지 않아 소비자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들도 "사설기관 중심의 시험 체계로는 데이터 품질과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며 제도적 보완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오유경 식약처장은 "임상기관 실태조사와 행정처분을 병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부작용 보고를 의무화하겠다"며 "감독 권한을 강화해 제도 신뢰도를 높이겠다"고 밝혔다. 식약처는 이를 국제 규제조화 흐름에 부합하는 첫 단계로 보고 있다.
정부도 뒤늦게 대응에 나섰다. 최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2025 화장품 위해평가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안전성 평가제 도입이 핵심 의제로 논의됐다.
리이치24시코리아 관계자는 "EU·캐나다 등 주요국에서는 안전성 평가 미비로 인한 리콜이 늘고 있다"며 "각국의 제도는 다르지만, 과학적 검증 강화를 통한 소비자 보호가 공통된 방향"이라고 말했다.
식약처는 2028년부터 화장품 안전성 평가제를 단계적으로 시행할 계획이다. 모든 원료에 대해 판매 전 안전성 입증 자료를 작성·보관하고, 자격을 갖춘 평가자의 검토를 거치도록 하는 제도다.
2031년부터는 전 제품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특성화 대학원 및 단기 교육과정을 신설하고, 업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동 평가 플랫폼과 원료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할 방침이다.
해외 주요국은 이미 규제체계를 고도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19년 개정된 '화장품 규정'을 통해 제품정보파일(PIF) 작성과 안전성 평가를 의무화하고 자료를 10년간 보관하도록 했다.
미국은 2022년 '화장품 현대화법(MOCRA)'을 제정해 제조사에 안전성 입증 책임을 부여했으며 중국도 2020년 '화장품감독관리조례'를 시행해 올해부터 전 제품 안전성 보고를 의무화했다.
반면 한국은 평가기관 인증제와 인체적용시험 관리체계가 여전히 법제화 단계에 머물러 있어 국제 논의에서 주도권 확보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화장품협회 관계자는 "국제 기준 대응에는 정부의 외교적 역할이 필수적"이라며 "데이터 관리체계와 시험 신뢰도 확보가 수출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식약처는 "중국, 미국 등 주요 수출국과의 규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며 "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국장급 협력회의에서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과 안전성 평가 자료 제출 간소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평가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제도화 작업을 가속화하고, 업계와 협력해 신뢰성 높은 관리시스템을 마련하겠다"며 "글로벌 규제조화 흐름에 발맞춰 수출 경쟁력 제고에 나서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