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지났지만 아직 바람 끝이 차다.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나 요즘 마른 나무를 주워 토방에 불을 땐다. 겨울철이면 집집마다 나무를 해 밥 짓고 소죽 끓이던 것이 30∼40년 전까지의 시골 생활인데 우거진 산을 곁에 두고도 난방비 때문에 추위에 떨며 지내는 것이 요즘 농촌의 실상이다.
퇴비는 물론 가마니와 멍석 등 농자재, 심지어 의복과 떡·술까지 자급자족했지만 지금은 당장 사용하기에 싸고 편하다는 이유로 전세계에서 생산한 것을 수입해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유한 전통 기술과 문화, 삶의 방식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시들고 있다.
며칠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기치를 들고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방침을 천명했다. 즉 타국의 국경 방어에 무제한의 자금을 제공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더이상 다른 나라에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특히 그린뉴딜 정책을 종식하고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한다든지 무역시스템을 재점검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 질서가 무너지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안보 무임승차 논란이나 추가적 개방 가능성 때문에 여기저기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의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Peter Zeihan)은 ‘세계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다(The End of the World is just the Beginning)’는 책에서 이제 미국에 대항할 나라가 없기에 냉전체제하에서 우방국들에 제공했던 안보와 자유무역이란 선물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설파한다.
미국이 지탱해온 세계를 연결하는 경제와 공급사슬이 붕괴되면 저비용 운송과 금융이 위축되고,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노동력까지 부족한 나라가 원자재와 에너지를 수입하여 상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판매하기는 어려워지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추진해 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성장 격차와 양극화·인구감소 등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은 물론 정부도 유례 없는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농업과 농촌이 무너진 가운데 자유무역 질서가 무너지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될까? 자이한에 따르면 자원과 노동력이 부족한 나라는 결국 산업화 이전 단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속가능하고 행복한 농업과 농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헬레나 호지(Helena N. Hodge)는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라는 저서를 통해 ▲친환경적인 지속가능한 경제 ▲가족공동체의 따뜻한 유대의식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문화적 자존심을 갖는 것이 행복한 삶의 핵심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인간이 서로 도우면서 사회를 형성하고, 공동의 운명에 대해 깊은 존중감을 갖는 미래란 오래 전 우리 모두가 실천해왔던 것이 아닌가?
국가 비상계엄과 함께 찾아온 정치·경제적 불안을 계기로 사회 각 분야에서 자성과 변화·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발등에 떨어진 트럼프 리스크를 극복하고 세계 질서의 붕괴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방법, 산업화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농업·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안전식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은 무엇인지?
뱀이 살껍질을 벗고 성장하듯이 치열한 각오로 ‘절실히 묻고 가까운 곳에서 생각’하는 절문근사(切問近思)의 지혜가 아쉬운 때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