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에 창설된 유엔이 24일 80회 생일을 맞았다. 60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된 2차대전이 끝날 무렵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제3차 세계대전은 막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유엔을 만들었다. 유엔헌장은 새로운 내용을 많이 담았지만,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영국·소련이 협력해 미래의 도전자들을 제압하고 세계평화를 지키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들 3국에 더해서 미국이 중국(장제스의 중화민국)을, 영국이 프랑스(드골 정부)를 끌어들여 유엔의 중추기관인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만들었다. 거부권을 부여받은 5개 상임이사국이 협력할 때만 안보리가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디자인됐으니 분명 중대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강대국을 제어하기 어려운 국제사회의 본질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러시아의 무력 침략, 원칙 흔들어
미국 리더십 흔들, 중국 역할 한계
한국엔 유엔 외교 지평 늘릴 기회

지난 80년 동안 나름 순기능을 해온 유엔이 지금 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무엇보다도 국가간 무력 사용을 금지한 유엔헌장의 원칙(2조 4항)을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정면으로 위반했다. 유엔이 탄생하면서 무력 사용을 불법화했는데 이 귀중한 원칙이 무너진다면 역사적 후퇴일 수밖에 없다.
2023년 10월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에 의한 테러 난동은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을 야기했고, 지난 2년 동안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참상이 초래되면서 이스라엘을 지원해온 미국의 국제 리더쉽도 크게 손상됐다. 유엔에서 미국과 유럽의 도덕적 우위는 갈수록 약화하고, 중국의 역량은 아직 서방을 대체할만한 수준은 아니어서 유엔은 리더십 부재 상태다.
또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유엔 예산 및 해외원조 예산 삭감은 지구촌의 수많은 분쟁 지역과 취약 지구에서 활동하는 유엔 산하 기구 및 전문기구들의 활동을 심각하게 위축시켰다. 말하자면 지금 유엔은 원칙·리더십·재정의 3대 위기를 동시에 맞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유엔이 사라질 거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창설자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유엔은 이미 대성공을 거뒀다. 51개 회원국으로 출발해 193개국이 가입한 모임으로 커졌다. 주권국가들은 자국이 참여하지도 않은 안보리 결정을 이행해야 하는 껄끄러운 의무도 지고, 매년 회비도 납부해야 한다. 그런데도 모두가 자발적으로 가입했고, 어떤 회원국도 탈퇴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안보리 제재를 받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포함해 10여 국이 소그룹을 만들어 때로는 유엔에서 공동행동을 하는데 그룹 이름이 아이러니하게도 ‘유엔헌장 수호그룹(GFDCUN)’이다. 유엔을 무시하는 트럼프 대통령도 유엔 흉을 보기 위해서는 유엔 총회에 나올 수밖에 없다. 전 세계 모든 국가가 365일 상시로 모이는 유일한 세계 최대 외교무대가 루스벨트와 처칠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을 반영한 유엔 헌장 위에 서 있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이다.
한국은 유엔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유엔의 선거 감시하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북한의 침략을 유엔군 참전으로 이겨냈고, 유엔의 도움을 받으며 경제성장을 이뤘다. 유엔에서 한국은 2차대전 이후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거의 유일한 국가로 칭송받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한국은 유엔이 지향하는 바를 모두 대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한국이 공적개발원조(ODA)를 대폭 증액해 유엔 외교가에서 화제이고, 한류 열풍도 뜨거워 유엔에서 한국의 국격이 수직 상승했다. 유엔은 대한민국에 가장 중요한 외교무대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북한 핵 문제와 인권 문제, 한반도 통일 문제 등 대한민국 국익과 직결된 이슈들을 다룸에 있어 유엔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 한다.
리더십 부재의 새로운 유엔에서 한국은 세계의 안보·개발·인권·환경·기후변화 등 각종 이슈에서 선도적이고 창의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인종 및 종교 갈등에서 자유롭고 제국주의의 역사적 빚도 없으면서 인권·경제·기술·국방·문화 면에서 두루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한국은 앞으로 유엔 무대에서 외교의 새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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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국 전 유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