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인지장애 치료 의약품
베타아밀로이드 응집 막아줘
치매로 진행될 위험 42% 낮춰
국내외 임상 연구로 효과 입증

치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이라 불린다. 기억의 조각을 하나둘 지우다 결국엔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려서다. 다행히 그 변화는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뇌 기능에 영향을 주는 신경세포가 쇠퇴하면서 경미한 인지 장애가 선행되는 게 일반적이다. 치매 전 단계로 통하는 경도인지장애(MCI) 단계부터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경도인지장애는 기억력 등 인지 기능은 저하됐지만, 일상생활에는 크게 지장이 없는 상태다. 경도인지장애를 겪는 이 중 약 10~15%가 매년 치매로 전환된다고 알려져 있다. ‘나이 탓’이라며 방치하지 말고 인지 변화가 감지될 때 즉시 대응하는 게 치매 예방의 출발점이다.
기존 약제 부담률 80%로 높아져
현재 경도인지장애와 초기 치매 환자에게 폭넓게 쓰이는 약제는 콜린알포세레이트다. 기억력이나 집중력 저하를 겪는 이들에게 인지 기능 개선을 목적으로 처방되는 약물로,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최근 제도 변화로 치매 예방약 시장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임상적 유효성 부족 등을 이유로 콜린알포세레이트에 적용되던 보험 급여가 축소돼서다. 그로 인해 지난달 21일부터 치매 진단을 받지 않은 환자가 콜린알포세레이트를 처방받으면 종전 30%에서 80%의 본인 부담률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업계가 주목하는 대체제는 은행잎추출물 기반 의약품이다. 은행잎추출물은 다수의 임상 연구를 통해 초기 치매와 경도인지장애 등에 처방 근거를 확보했다고 평가받는 성분이다. 항산화 작용으로 뇌세포를 보호하고 치매의 원인으로 알려진 베타아밀로이드의 응집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
베타아밀로이드는 단백질의 한 종류로, 뇌에 축적되면 초기에는 작은 조각(모노머)으로 존재하다가 점차 끈끈한 형태의 작은 올리고머 덩어리를 형성한다. 이후 섬유 형태(프로토피브릴)를 거쳐 베타아밀로이드 플라크라는 큰 덩어리로 발전, 뇌에 쌓이면서 뇌세포 손상과 치매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 은행잎추출물은 이중 올리고머화 과정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고된다.
이를 입증하는 국내 연구결과도 있다. 순천향대 천안병원 신경과 양영순 교수가 아밀로이드 PET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경도인지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은행잎추출물과 콜린 전구체 등 인지 보조제를 12개월간 투여하며 임상 경과를 비교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은행잎추출물 투여군에서 베타아밀로이드 응집 정도를 나타내는 MDS-Oaβ 수치가 낮아지는 효과가 확인됐다. 은행잎추출물을 투여한 환자군의 MDS-Oaβ는 0.88ng/mL에서 0.80ng/mL로 0.08ng/mL 감소한 반면, 비교군은 0.89ng/mL에서 0.91ng/mL로 오히려 0.02ng/mL가량 수치가 증가했다. MDS-Oaβ는 올리고머화 경향을 수치화한 지표로, 수치가 낮아질수록 치매 진행이 억제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된다.
‘노인성 치매’로 불리는 알츠하이머병 전환율에서도 효과가 두드러졌다. 종합 임상 판정 결과, 은행잎추출물 투여군에서는 12개월간 경도인지장애에서 알츠하이머병으로 전환한 사례가 없었으나 비교군에서는 전체 22명 중 3명(13.6%)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됐다.
양영순 교수는 “일반적으로 아밀로이드 PET 양성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1년 내 10~20%가 치매로 전환되지만, 베타아밀로이드 응집이 억제된 환자군에서는 알츠하이머병으로의 전환 사례가 관찰되지 않았다”며 “은행잎추출물의 베타아밀로이드 응집 억제 효과와 알츠하이머병 발병 간의 연계성이 이 연구를 통해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도 은행잎추출물의 효과가 입증됐다. 대표적인 게 독일에서 과거 의료기록을 기반으로 진행한 장기 추적 연구다. 해당 연구에서는 2000년부터 2019년까지 경도인지장애로 처음 진단받은 65세 이상 환자 2만4483명을 2021년 2월까지(평균 3.8년, 최대 20년) 관찰했다. 그 결과 은행잎추출물을 5회 이상 복용한 환자군에서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약 4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에서도 증상 관리 약물로 승인
이러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전문가들은 은행잎추출물을 경도인지장애 치료의 유효한 선택지로 본다. 아시아 신경인지 질환 전문가그룹(ASCEND)은 2021년 합의문을 통해 은행잎추출물을 경도인지장애 치료에서 클래스(Class) I, 레벨(Level) A로 권장되는 유일한 약제라고 밝혔다. 클래스 I는 가장 높은 수준의 권고 등급을 의미하며 레벨 A는 권고에 대해 가장 높은 수준의 과학적 근거가 뒷받침될 때 부여한다. 독일·스페인·오스트리아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도 은행잎추출물 제제를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증상 관리 약물로 승인하고 있다. 양영순 교수는 “(은행잎추출물처럼) 베타아밀로이드 올리고머 경향에 관여하는 치료제는 아세틸콜린 작용 성분과 달리 경도인지장애 치료 패턴을 ‘증상 개선’에서 ‘진행 억제’로 바꾸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