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저물고 있다. 올해도 영화·방송·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대중음악 업계는 수많은 콘텐츠들을 선보이며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썼다. 어떤 것은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았고, 어떤 것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도 많았다. 영화 <서울의 봄>은 윤석열 대통령이 일으킨 ‘12·3 비상계엄 사태’ 로 인해 개봉 약 1년 만에 재조명됐다.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사인 하이브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 간 갈등은 최고 인기 K팝 그룹인 뉴진스의 전속계약분쟁으로까지 번졌다.
올 한 해 대중문화계 주요 이슈들을 놓고 시상식을 펼쳐봤다.
◇ ‘올해의 한마디’ 상
“맞다이로 들어와. 개저씨들아”.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하이브는 지난 4월 산하 레이블 어도어 대표인 민희진씨가 하이브의 경영권을 찬탈하려 한다며 대대적인 감사에 들어갔다. 최고 인기 그룹인 뉴진스의 소속사여서 파장이 컸다. 한동안 침묵하던 민 전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2시간 넘게 하이브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형식도 내용도 전형성을 파괴한 기자회견 후 여론은 민 전 대표에게로 기울었다. 그가 기자회견 때 착용한 옷과 모자가 품절됐고, 기자회견을 뮤직비디오처럼 편집한 영상이 나왔다. ‘국힙 원탑’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민 전 대표는 현재 하이브와 법적 분쟁 중이다.
‘하이브-민희진’ 갈등은 뉴진스 멤버들의 거취도 흔들었다. 멤버들은 어도어에 민 전 대표를 대표이사직에 복귀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난달 29일부로 어도어와의 전속계약 종료를 선언했다. 국내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 최고의 K팝 그룹이 엮인 문제는 정치권으로도 확대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멤버 하니가 ‘직장 내 괴롭힘’ 문제와 관련해 증인으로 출석했고,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하이브 측이 작성한 아티스트 평가 문건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어도어는 현재 뉴진스를 상대로 전속계약 확인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맞다이로 들어와. 개저씨들아”는 올해 대중음악계의 가장 큰 이슈의 시작을 알린 것이나 다름없는 한마디였다.
◇ ‘신기술’상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K팝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플레이브’로 대표되는 버추얼 아이돌이다. 지난해 데뷔한 플레이브는 일반 K팝 아이돌 못지 않은 강력한 팬덤을 기반으로 올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다. 발표하는 신곡마다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찍었고, 국내 버추얼 아이돌로서는 처음 연 오프라인 콘서트는 전석 매진됐다.
타 가수와의 협업 무대도 선보였다. 지난달 일본 교세라돔에서 열린 대중음악 시상식인 마마(MAMA) 어워즈에서 가수 이영지와 함께 ‘스몰 걸’을 부른 콜라보 무대가 화제가 됐다.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멜론뮤직어워드에서는 ‘탑 10’, ‘밀리언스 탑 10’ 부문을 수상했다.
플레이브가 인기를 끌자 다른 버추얼 아이돌들도 우후죽순 데뷔하기 시작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대형 기획사로서는 버추얼 아이돌 육성에 가장 적극적이다. 그룹 에스파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버추얼 캐릭터 ‘나이비스’ 활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최근 지상파 방송인 MBC와 버추얼 캐릭터 사업 관련한 업무 협약을 맺었다. 하이브의 자회사 수퍼톤은 지난 6월 버추얼 걸그룹 ‘신디에잇’을 선보였다.
◇ ‘카산드라’상
윤석열 대통령이 일으킨 ‘12·3 비상계엄 사태’로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이 재조명받았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다룬 작품이다. 올해까지 1312만명이 관람한 지난해 유일한 ‘천만 영화’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는 대사는 비상계엄 사태 후 누리꾼들의 ‘밈’이 됐고 재개봉 요청도 쏟아졌다. ‘카산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다.
전두환(영화상 이름은 전두광)에 맞선 정의로운 군인을 연기한 주연 배우 정우성이 혼외자를 출산했다는 사실도 논란이었다. 정우성은 청룡영화상에서 “모든 질책은 제가 받고 안고 가겠다”며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세대 초월’상
영화 <파묘>는 한국에서 지난해 2월 개봉해 관객 1191만명이 관람했다. 한국 호러 영화사상 최초의 ‘천만 영화’ 반열에 올랐다. 제작비 140억원을 투입해 세계적으로 1362억원(9708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특히 인도네시아·베트남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인도네시아·베트남에서 개봉한 한국영화 중에서도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파묘>의 흥행은 세대를 초월했다. 일제강점 역사와 결부시킨 퇴마 이야기가 국민적으로 통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오컬트 장르가, 50대 이상 중장년층 관객에게는 풍수지리와 무당 등의 소재가 흥미를 끌었다.
◇ ‘엇갈린 기대’상
이제 한국 영화는 ‘대박’이 아니라 ‘중박’을 노려야 할까. ‘천만 영화’의 꿈을 품고 막대한 비용으로 제작한 대작들은 줄줄이 고꾸라졌다. 1월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2부>는 제작비 370억원을 쏟아부은 올해 최대 규모 작품이었다. 역대 한국 영화를 통틀어도 <설국열차>에 이어 두 번째로 비용이 많이 들었다.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려면 관객 800만명이 필요했지만 143만명에 그쳤다. 제작비 185억원이 투입된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도 ‘쪽박’을 차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기대감이 낮았던 ‘소소’한 영화 중에서 좋은 성적이 나왔다. 6월 개봉한 <핸섬가이즈>는 제작비 46억원으로 만들어진 ‘B급 호러 코미디’였지만 입소문을 타며 흥행했다. 관객 177만명이 관람해 손익분기점(110만명)을 가뿐히 넘겼다. 7월 개봉한 <탈주>도 85억원으로 제작돼 손익분기점(200만명)을 넘긴 255만명을 동원했다. 영화진흥위원회도 제작비 10억원 이상 80억원 이하의 ‘중급 규모 영화’에 지원을 집중할 계획이다.
◇ ‘다크서클 유발’상
‘다음 화 재생 버튼을 누르게 하라’. OTT 시대 모든 콘텐츠 창작자들의 공통 목표다. ‘뒤로 가기’ 버튼 한 번이면 무한하다 해도 좋을 만큼의 콘텐츠가 선택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날 컨디션 난조를 감수하고 ‘밤샘 정주행’을 감행하게 하기란 더욱더 쉽지 않다. ‘다크서클 유발상’이야말로 콘텐츠에 주어지는 최고의 상찬인 이유다.
올해 다크서클 유발상은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돌아갔다. 지난 9월 공개와 동시에 반응이 폭발한 이 프로그램은 스타 셰프 ‘백수저’ 20인과 무명 셰프 ‘흑수저’ 80인이 벌이는 요리 대결을 담았다. 개성 넘치는 출연자들, 군침 돌게 하는 화려한 요리, 무협 소설을 방불케 하는 ‘요리 액션’은 보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았다. 무엇보다 요리를 대하는 셰프들의 진중한 태도와 이를 바탕으로 벌인 진검승부는 진한 감동을 안겼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나야, 들기름”(최강록 셰프) “이븐하게”(안성재 셰프)는 하반기를 ‘장악’한 유행어가 됐다.
<흑백요리사>의 성공은 외식업을 비롯한 요리 분야로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출연자들의 식당은 예약조차 불가능할 만큼 손님이 몰리고 있다. 파인다이닝 등 미식 경험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다. 요리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의 부활은 셰프 열풍이 당분간 꺼지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 ‘형보다 아우’상
올해 방송계에서 가장 외면받은 속담이 있다면 ‘형만 한 아우 없다’ 아닐까. 코로나19 종식 이후 얼어붙은 콘텐츠 시장에선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형’보단 검증된 ‘아우’가 대접받았다. 인지도와 팬덤을 확보한 콘텐츠의 속편 제작은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넷플릭스는 역대 최고 흥행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지옥>, <스위트홈> 등 수많은 시리즈의 시즌 2~3을 속속 공개했다. 예능도 예외는 아니다. <피지컬 100>, <좀비 버스>가 두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리메이크, 스핀오프도 활발하게 시도됐다. MBC는 한국형 수사물의 시초격인 <수사반장>의 프리퀄 <수사반장 1958>을, tvN은 인기 드라마 <비밀의 숲>의 스핀오프 <좋거나 나쁜 동재>를 선보였다. 웨이브는 한술 더 떠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2000년대 명작 드라마를 OTT 시리즈로 재편집해 내놨다.
이 현상은 넷플릭스 1강 체제의 지속과 무관하지 않다. 넷플릭스가 촉발한 ‘제작비 인플레이션’으로 방송사 및 국내 OTT의 곳간은 쪼그라들었고, 제작 편수 감소 등 몸 사리기로 나타났다. 저자본으로 만들 수 있는 쇼트폼 드라마의 부상, 수년간 답보 상태였던 웨이브-티빙 합병의 본격화 역시 이 흐름 안에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