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27일 오후 2시가 되자 당뇨를 앓던 A씨(60)가 긴장된 표정으로 6명의 전문가 앞에 마주 앉았다. 평창군 보건의료원이 마련한 A씨 건강관리 청문회장이다. 의사, 간호사, 운동처방사, 영양사, 연구원 등 6명의 전문가가 가벼운 인사 후 A씨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김종명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식사 메뉴와 평소 운동 정도를 자세히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약 1년 전 당뇨를 진단받은 A씨는 몇 년 전보다 살을 20kg 넘게 뺐다. 운동도 꾸준히 한다. 주 5일 배드민턴을 친다. 고기 같은 단백질도 잘 챙겨 먹는 편이다. 한 달 전 검진 때보다 당화혈색소(적혈구 속 헤모글로빈(혈색소)과 혈중 포도당이 결합한 형태를 말한다. 당뇨병 환자에게 중요한 수치로 2~3개월 동안 평균치를 평가한다)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밥 먹는 시간대를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함희연 영양사는 A씨 식사 패턴을 더 자세히 확인했다. A씨는 일이 바빠 점심을 대충 먹거나 건너뛰었다. 저녁에는 배드민턴 운동 후 반주와 함께 야식을 먹곤 했다. “운동하고 왔는데 아무것도 안 먹으면 당이 떨어져 손이 떨린다”는 A씨 말에 함 영양사는 “손이 떨릴 때 혈당을 한 번 체크해보시라”며 “실제 혈당이 떨어지지 않는데 먹는 것이면 습관이다. 혈당이 떨어졌다고 하면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는 건 맞는데 건강한 음식으로 대체해 먹으라”고 말했다.
30분간 전문가들에게 ‘잔소리’를 한바탕 듣고 난 후 진료실을 나오며 A씨는 “처음엔 청문회 같았는데 나한테 필요한 이야기를 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집에 가자마자 먹는 양부터 좀 조절해보고 싶다”는 그는 “밥양을 손바닥보다 적게 먹으라니, 이거 손바닥을 키울 수도 없고, 허허”라는 농담을 건넸다.
가까운 미래 한국 의료의 핵심 키워드는 단언컨대 ‘만성질환’이다. 최근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서는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이는 고혈압, 당뇨병, 암 등 만성질환을 지병으로 달고 사는 노령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병관리청 통계를 보면 2023년 만성질환 사망자는 27만5183명으로, 전체 사망의 78.1%를 차지했다. 총진료비의 84.5%가 만성질환에서 발생한다.
정부는 폭증하는 의료수요를 떠받치기 위해 ‘의사 수 증원’이라는 카드를 가장 먼저 꺼내 들었다. 증원된 의사는 10년 후에나 현장에 나온다. 지방에는 당장 의사가 부족하다.
지난해 의료계가 ‘의대 증원’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중에 강원 평창에서는 평창군 보건의료원을 중심으로 ‘조용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었다. 강원 평창군으로 향했다.
군청과 보건의료원이 있는 평창 읍내는 서울 도심에 비해 훨씬 한산했다. 평창군 면적은 서울의 2.4배(1464㎢)지만, 인구는 250분의 1 수준인 약 4만명이다. 인구감소지역인 평창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서울보다 17%포인트 높은 35.1%(2024년 12월 기준)다.
만성질환은 지방에서 더 심각한 의제다. 농촌 노인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건강하게 생활할 것 같지만, 오히려 많은 만성질환에 시달린다. 농촌지역이 더 많이 포함된 ‘군’ 지역이 도시지역보다 연령표준화 사망률이 유의하게 높았음을 보고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박건희 평창군 보건의료원장은 “정확한 원인은 인류학적으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농번기에는 힘들게 노동하고 농한기인 겨울철에 활동량이 떨어지는 생활환경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만성질환자에게는 1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명의보다는 지속적으로 생활습관 개선을 도와줄 ‘동네 의사’가 절실하다. 전체 의료인력이 152명(의사 1명당 인구 1092명)에 불과한 평창군은, 의사 부족이라는 절대적인 악조건을 새로운 일차의료 시스템으로 돌파해보는 시도를 진행 중이다.
의료원은 지난해 1월부터 서울대 의대 오주환 교수 연구팀과 함께 군민 700명을 대상으로 스마트 헬스케어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다학제 진료’를 하고 있다. 연구팀은 고혈압과 당뇨가 있는 이들에게 측정 기기를 제공하고 혈압과 당 수치를 체크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 매일 입력하도록 했다. 수치가 양호하면 초록색, 애매하거나 나쁘면 노랑·주황색, 매우 나쁘면 빨간색으로 연구팀 현황판에 표시된다. 2주 정도 빨간불이 이어진 사용자들은 치료가 잘되지 않거나, 생활습관에 문제가 있는 경우다. ‘특별관리대상’이 되는 이들을 병원으로 호출해 다학제 진료로 전반적인 생활습관 지도를 한다.
박 원장은 “2025년엔 이 대상을 1000명까지 확대하고, 앞으로는 고령의 만성질환자 대부분을 목록에 넣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인구 930만의 서울에서는 어려울 수 있어도 인구 4만명의 평창이라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의료원의 다학제 진료는 ‘3분 진료’만 가능하게 하는 현재 의료 시스템을 보완하고 제대로 된 일차의료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다. 김종명 전문의는 “오전에만 50명의 환자가 오는데, 이들을 다 보려면 ‘3분 진료’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장에서 ‘만성질환 진료지침’이라고 쓰인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원칙적으로는 당뇨나 고혈압 환자에게 지침에 따라서 운동요법과 식사요법을 진료 시에 자세히 안내해야 하는데 의사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26일 화요일 오전 11시30분. 한의사 공보의 B씨는 인근에 사는 91세 연인숙씨의 집으로 향했다. 연씨는 허리와 다리 통증으로 집 안에서만 생활한다.
B씨는 지난해 9월부터 매주 화, 목 두 차례 연씨 집에 방문해 침을 놓았다. 연씨는 “허리가 안 좋아 누워서 텔레비전을 봐야 했는데 이제 앉아서 볼 수 있게 됐고, 왼손에는 파스를 거의 안 붙이게 됐다”고 했다. B씨는 “어르신이 한쪽 팔을 수술하신 후로 다른 팔을 많이 쓰시면서 부하가 와 여러 곳에 통증이 생겼다”며 “통증 감소에 초점을 맞춰 치료했다”고 말했다.
B씨 장비는 침통 하나뿐이다. 연씨에게는 단비와 같은 의술이다. 연씨 요양보호사는 “어르신이 병원에 한 번 나가시려면 아드님을 불러야 하기 때문에 거의 못 가신다”며 “진통제와 찜질, 파스로 통증을 겨우 견디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공보의 왕진은 기존 시스템에 약간의 ‘동기부여’를 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박 원장은 보건지소에서 근무하는 공보의가 평상시 업무 외에 자발적으로 시책사업을 만들어 추가 업무를 할 경우 ‘업무활동 장려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평창군에 건의했다. B씨는 왕진을, 다른 치과 공보의 한 명은 취약계층에 대한 구강검진과 무료 스케일링 등을 업무 계획으로 제출했다.
공보의 C씨는 주 1회 자신의 근무지가 아닌 다른 보건진료소로 찾아가 더 많은 환자를 돌본다. 수요일 점심시간이 지나자 어르신 10여명이 거문 보건진료소 대기실의 작은 소파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진료를 기다렸다. 당뇨로 20년 넘게 고생했다는 한 어르신은 의사를 보자마자 “음식만 먹으면 설사를 한 지 오래돼 괴롭다”고 호소했다. C씨가 “큰 병원에서 대장 내시경을 받아보라”고 권했으나, 어르신은 “버스 타고 강릉의 큰 병원까지 동행해줄 보호자가 없다”며 난색을 보였다. C씨는 환자의 생활습관이나 병력을 천천히 물은 후 “당뇨 합병증으로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더부룩하지 않게 천천히 드시라”며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되는 약을 처방했다.
이날 진료소를 찾은 환자들은 대부분 관절염,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등의 만성질환을 중복으로 가지고 있었다. 1년에 한두 번은 강릉이나 서울의 큰 병원에 찾아가 정기 진료를 받고 오지만, 그 외 웬만한 통증이나 질환은 참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박 원장은 “평창에 오기 전에는 보건진료소를 찾는 사람이 적으면 문을 닫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도 했는데, 와보니 의료취약지 최전선에서 주민의 건강관리와 치료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거문 보건진료소 한쪽에서는 작은 ‘다학제 진료’가 이뤄지고 있었다. 영양사, 운동처방사, 간호사가 팀을 이뤄 방문하자 근처 주민들이 삼삼오오 차를 얻어 타고 모여들었다.
간호사들은 큰 모니터에 설명을 띄우고 기기를 이용해 혈압, 혈당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주민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혈압 잴 때 이 자세로 해도 되는지 봐줄 수 있나요” “밥 먹고 바로 혈압 재지 말라고 하는데, 얼마나 있다가 재야 하나요” 등이었다. 영양사에게는 “당뇨 있으면 과일 먹지 말라는데 먹어도 되나요” “귤이나 사과는 한 번에 몇개 먹어도 되나요” “믹스커피 마셔도 되나요, 하루에 몇잔 마셔도 되나요” 등을 물었다. 영양사는 “과일은 무른 것보다 심지가 있는 단단한 것을 여러 차례에 나눠 드시라”고 했다. “단백질을 많이 드시라”는 답과 함께 “생고기는 자주 드시기 어려우니 시장에서 황태채를 잔뜩 사서 여러 요리에 넣어 드시고, 고구마나 옥수수 대신 삶은 계란을 간식으로 드시라”며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줬다.
작은 보건진료소부터 의료원까지 평창에서 진행되는 ‘실험’의 핵심은 의사 1인 외에도 다양한 보건의료직종과 지역 공무원이 자연스러운 협업 체계를 이루는 것이다. 박 원장은 “일차의료는 의료인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동네에서 알아서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