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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시 백남준아트센터 제2전시실. 그곳을 찾은 관람객은 작은 연구실 같은 곳에 다시 들어서게 된다. 한쪽 벽엔 온통 암석 표본과 사진, 드로잉이 걸려 있고, 방 한 가운데엔 작은 수조가 놓여 있다. 이곳은 '신자연 연구' 등의 영상·설치·드로잉 작품이 놓인 아티스트 장한나의 전시 공간. 여기 놓인 암석은 진짜 돌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돌처럼 변한 플라스틱 덩어리(장씨는 이를 '뉴 락'이라 부른다)로, 장씨가 그동안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집해온 것들이다.
장씨는 "플라스틱이 인간의 손을 떠난 후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태계의 새로운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며 "작품을 통해 우리 일상에 가시화되지 않은 생태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예술과 과학 사이에 놓인 장씨의 '뉴 락' 연구는 요즘 젊은 예술가들의 기술 문명과 생태에 대한 관심, 기존 예술 형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작업 경향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동시대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보여주는 전시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6월 29일까지)이 지난 20일 개막했다. 백남준아트센터가 2018년부터 '미디어 아트 개척자' 백남준의 실험 정신을 기리며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모아 소개하는 전시다. 전시 제목 '랜덤 액세스'는 백남준이 1963년 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선보인 작품에서 따왔다.
올해 전시에는 고요손, 김호남, 얀투 등 국내외 7개 팀(8명)의 비디오, 조각, 설치 등 14점을 선보인다. 전시 규모는 작지만, 첨단 기술을 활용해 현실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일본 작가 얀투의 '진행 중인 설치'는 자동 운반 차량(AGV)이 다양한 오브제를 선택하고 끊임없이 운반·설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술품'과 '예술품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고 일하는 기계가 현대 물류 창고와 전시장의 모습을 대변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얀투는 "기계는 모든 대상을 동등하게 다룬다"며 "인간 중심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기술의 면모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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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광케이블에 주목한 작품도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호남의 '해저 광케이블을 위한 에코챔버 시스템'이다. 작품은 전 세계 9개 도시 서버 간의 데이터의 전송 시차에 따른 변화를 공간의 울림과 화면의 미묘한 차이로 보여 준다. 광케이블로 연결된 지구, 작가가 찍은 바다 영상, 그리고 각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조금씩 엇갈리며 어우러지는 소리와 화면은 감각적으로 쓰인 한 편의 시 같다.
태국 작가 사룻 수파스티벡의 '콰이강:고인을 기리며 열린 추모식'은 '콰이강'(매클로 강의 일부 구간)을 소재로 역사적 비극이 현재 관광 상품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보여 준다. 콰이강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태국 점령기에 미얀마-태국 철도 건설 과정에서 많은 전쟁 포로와 노동자가 희생된 곳. 그러나 현재 이곳에선 '콰이강의 다리 빛과 소리 쇼'가 열린다. 희생자 묘지에 놓였던 꽃다발을 형상화한 조각과 영상을 통해 작품을 하나의 의례 공간으로 재현한 점이 돋보인다.
한우리는 영사기, 비디오 영상, 대리석 모자이크 타일을 대비시킨 작품 '포털'로 현대 기술 사회를 탐구했고, 정혜선·육성민은 동물 추적 데이터가 활용되는 미래의 지구 환경을 그린 영상·설치 작품 '필라코뮤니타스'를 선보인다. 한편 고요손은 전시 기획자와 공유한 경험을 모티브로 한 '임채은의 오로라 여정기', 아버지와 협업한 비디오 조각 '손정호의 미래 일기'를 함께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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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와 함께 참여 작가가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열린다. 28일, 3월 1일 정혜선·육성민의 생태 워크숍 '날개의 배낭:감각 네트워크', 3월 22일, 29일 김호남의 코닝 워크숍 '연산전시 워크숍'도 예정돼 있다. 월요일 휴관. 전시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