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전기를 살리는 길

2025-03-06

모처럼 정치가 제 역할을 했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확정됐고, 지난달 27일에는 에너지 3법이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에너지 3법은 고준위방폐장특별법, 전력망확충특별법, 해상풍력특별법 등이다. 모두 특별법이고 내용도 특별하다.

고준위방폐장법은 핵연료(고준위 방폐물) 처리 문제 해결을 위한 절차를 담은 법안이다. 2060년까지 영구 폐기시설을 짓고, 그 전에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시설이 포화 상태가 되면 현행처럼 발전소 안에 임시로 저장할 수 있도록 했다.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현금성 지원도 가능하도록 했다.

전력망확충법은 각종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환경영향평가에 특례를 도입한다. 기본계획 수립 시 공청회가 어려울 것 같으면 안 해도 된다. 실시계획 승인 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협의 요청을 받은 관련 행정 기관장은 60일 이내에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회신을 해야 한다. 회신을 안 하면 협의로 간주된다. 또한 이 법에 의해 실시계획 승인을 받으면 35개에 달하는 개별 인허가가 면제된다. 환경영향평가 협의를 요청받은 행정기관장은 45일 이내에 산업부 장관에게 의견을 통보해야 하고, 안 하면 협의가 완료된 것으로 한다. 이때 주민 등의 의견 수렴 절차는 기존 환경영향평가법이 아니라 이 법의 대통령령으로 따로 정하도록 했다. 자연재해대책법에 따른 재해영향평가도 협의만 하면 되고, 20일 이내에 행정안전부 장관이 통보를 안 하면 협의가 완료된 것으로 본다. 지역주민에게는 특별한 보상이나 지원을 할 수 있고, 주민들이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을 시행할 경우 별도로 지원도 가능하다.

에너지 3법, 가격신호 측면서 의미

해상풍력법 역시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환경영향평가와 해양이용평가 시 특례를 적용한다. 발전지구 관련 지역주민과 어업인에게는 금융지원도 가능하다. 국가재정법에도 불구하고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도 가능하다. 환경영향평가 및 해양이용평가에 관한 특례를 적용해 관련 장관이 의견만 제출하면 협의가 완료된 것으로 한다. 또한 이 법에 따라 실시계획 승인을 받으면 28개에 달하는 개별 인허가가 면제된다. 발전사업자 선정 시 석탄발전소를 소유한 공공기관은 우대할 수 있도록 했다.

남은 문제는 앞으로 우리의 희망대로 에너지 전환이 일어날 것인가이다. 20여년간 전기 문제를 다루어 온 입장에서 보면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는 아직도 어렵다. 전기에 관한 지금과 같은 미숙한 인식과 편견이 지속되면 에너지 3법도 유명무실해질 뿐이다. 반면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개하고, 정책 입안자들과 이해관계자들이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고, 전기를 공급을 넘어 가격신호 측면에서 재인식하게 된다면 이번 에너지 3법은 매우 의미 있는 초석이 될 것이다.

전기에 대한 미숙한 인식의 대표적인 예로 아직도 주택용 전기요금을 비싸게 팔아서 산업용을 보조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 이번 에너지 3법 관련, 지난달 19일 국회 상임위 회의록의 모 의원 발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전력공사는 (…) 전기를 독점 판매하면서 (…) 용도별 차등요금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도별 차등요금제에 더하여 모든 용도의 전력 중 오직 주택용 전력에 대해서는 (…) 누진요금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불공정한 용도별 차등요금제 때문에 (…) 높은 전기요금을 납부하는 국민이 낮은 전기요금을 납부하는 사업체에 높은 전기요금과 낮은 전기요금의 차액만큼을 지원해 주는 소위 교차보조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기요금을 모르고 한 발언이다. 주택용이 산업용을 교차보조를 한다는 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다. 지금은 반대로 산업용, 그것도 대기업이 사용하는 산업용이 큰 규모의 교차보조를 통해 주택용 전기의 가격 인상을 막아주고 있다. 주택용에는 누진제가 있지만 산업용에는 그보다 더 가혹한 계절별·시간대별 요금제가 있다. 주택용은 가가호호 저압으로 전기를 나르지만 산업용은 고압으로 송전하므로 송배전 비용이 저렴하다. 주택용 전기의 수요는 시간대별로 변동이 크지만, 산업용 전기는 수요 패턴이 일정해 첨두부하 설비 부담이 크지 않다. 그러함에도 최근 15년간 산업용을 집중적으로 인상한 결과 kWh당 산업용은 183원이 되었고 주택용은 이보다 훨씬 싼 150원 수준의 평균 단가를 갖게 됐다. 무턱대고 산업용 전기를 두둔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정확한 데이터를 근거로 정책을 수립해야 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전력정보 적극 공개로 갈등 해소를

한전과 전력 당국은 전기요금 용도별 원가회수율 등 관련된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해서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에너지 3법을 통해 주민 의견수렴이나 환경영향평가 이행 등에 과감한 특례를 부여했지만, 결국 관련 정보 공개나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회적 콘센서스를 이루지 못하면 유의미한 개선은 먼 이야기이다. 지금처럼 데이터를 꼭꼭 숨기고 필요할 때 정책 당국에 유리한 자료만 흘려서는 언젠가 큰 역풍을 맞을 것이다. 정치권은 ‘전력정보 공개법’을 만들어서 정부와 이해관계자의 갈등 요인이 해소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에너지 3법 통과를 계기로 부각되어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제 전기는 공급 위주의 정책을 넘어서 합리적인 가격신호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비중이 높아질 재생에너지는 계절별에 더해 시간별, 지역별로 공급량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복잡도가 높은 시장에서 정부(정치)가 가격 결정권을 행사하면, 시장 전반의 비효율성이 현저히 증가한다. 결국 실시간 가격을 통한 수요 조절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며, 이를 위해서는 전기요금의 독립성 제고와 함께 판매 시장의 독점 해제가 필수적이다. 일부는 판매 시장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을 민영화와 동일한 개념으로 주장하지만,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현시점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만 판매 시장이 독점체제로 운영된다. 에너지 3법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한 에너지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정치가 전기를 위해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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