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 감독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원작자인 로알드 달은 ‘가장 대담하고 뻔뻔스러운’ 어린이 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책은 63개 언어로 번역돼 2억부 넘게 팔렸다. 그가 1990년 74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이 지난 2023년 2월 난데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판권을 가진 출판사가 로알드 달의 작품 속 표현을 현대 독자들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 수준에 맞도록 수정한 것이다.
수정본에는 신체나 정신건강, 젠더, 인종 등과 관련한 표현 수백 가지가 다시 쓰였다. 뚱뚱한(fat)은 거대한(enormous)으로, 쪼끄만(tiny)은 작은(small)으로 바꿨다. 검다(black)와 하얗다(white)는 대부분 삭제됐다. 작품이 변형된 것이 알려지자 사회 각계에서 비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달이 알았어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법한 일이다.
정치적 차별과 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PC주의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은 최근 진보와 보수 사이 문화전쟁의 핵심 키워드다. 다채로운 표현이 가능한 게임업계가 최전선으로 꼽히는데, 과도한 다양성을 이용자들에게 강요하다 폭망한 경우도 있다. 지난해 8월 출시된 소니의 슈팅게임 ‘콘코드’가 대표적이다. 4억달러(약 58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이 게임은 ‘어색한’ 캐릭터 디자인과 난해한 게임 진행 메커니즘 등으로 출시된 지 2주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DEI 정책 폐기 행정명령으로 야단법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2일 “지난달 31일 이후 12개 이상 미국 정부 웹사이트에 있는 8000개 이상 웹페이지가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사라진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포용성’, ‘트랜스젠더’ 등의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물론 DEI 폐기는 PC주의의 영향으로 인종과 성별에 대한 건전한 비판마저 금기시되는 기류가 형성된 뒤 생겨난 부작용일 수 있다. 자칫 남용될 경우 세상이 때로는 이성을 잃은 자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우리 처지도 다를 바 없다. 강 건너 불구경할 일은 아니다.
박병진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