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된다, 비극에서 비극으로

2024-11-28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흔히들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 겪는 개인에게 비극은 아무리 반복된들 그저 비극이지 않을까. 서울시극단의 창작극 ‘퉁소소리’(11월11~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초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조위한(1567~1649)의 한문 소설 ‘최척전’(1621)을 원작으로 한 이 연극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호족의 명나라 침략 등 약 30년 새 잇따라 벌어진 전란을 배경으로 한다. 전북 남원에 살던 양반 최척과 그의 아내 옥영이 중국·일본·안남(베트남)까지 휩쓸려갔다 인고와 투지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모든 가족이 결합하는 내용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고선웅 연출이 15년간 별렀다 펼친 마당에 이호재·박영민·정새별 등 배우들이 펄펄 뛰어 노니 150분간 박장대소하다 꺼이꺼이 눈물을 훔쳤다.

비록 400년 전 이야기지만 현대사의 이산가족을 여태 치유 못 한 우리에게 결코 과거형이 될 수 없는 아픔이다. 그뿐만 아니라 ‘퉁소소리’, 아니 원작 ‘최척전’의 내용은 놀라우리만치 현대적이다. 일단 아우르는 공간이 베트남까지 뻗고, 명나라 집안 며느리를 들이는 국제결혼도 등장한다. 침략 왜군의 잔혹성을 묘사하는 것과 별개로 옥영을 거두고 도와주는 일본 상인의 자애로움도 편견 없이 그려낸다. 불운에 맞서는 여성들의 강인함이 강조될 땐 ‘이게 17세기 조선 소설 맞나’ 싶을 정도다.

달리 보자면 그 시대로부터 오늘날이 그렇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실제로 역사학자들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이후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질서를 뒤바꾼 신호탄이었다고 본다. 팽창하는 해양 세력(일본)이 구질서를 주도해온 대륙 세력(중원의 한족 국가)과 한반도에서 충돌한 이후 이 땅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최척전’의 인물들처럼 살아왔다. 각자가 겪고 만나는 세계가 한층 넓어지고 복잡해졌다.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다시 친구가 되는 일이 반복됐다. 주변 국가 간 힘의 충돌 속에 줄타기하며 개인의 생존 분투를 적극 해낸다는 점에서 17세기 조선인은 13세기 고려인보다 21세기 한국인과 더 가까울지 모른다.

고선웅 연출은 ‘퉁소소리’ 인사말을 통해 “시대가 달라도 여전한 울림이 있을 것”이라면서 “지금도 세상은 도처에서 전란 중”이라는 안타까운 소회를 밝혔다. 이 땅에서 더는 전쟁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간절하게 전했다. 누군들 아니겠나. 그러나 명나라에 피난 간 최척이 난데없이 호족과의 전투에 용병으로 가게 되듯, 역사의 광풍 앞에 개인은 무력할 때가 많다. 난생처음으로 국경을 벗어났을 북한의 젊은이들이 애꿎게 우크라이나에서 총알받이가 되고 있는 현실만 봐도 그렇다. 이 비극을 끝낼 수 있을지. 연극이 끝난 자리에 퉁소소리만 적막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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