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1만8000원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기장을 산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처음부터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일기를 쓰려면 몰래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미켈레와 아이들에게 숨겨야 할 테니까. 나는 비밀을 만들기 싫다. 게다가 우리 집은 너무 비좁아서 비밀을 만들래야 만들 수도 없다.”
<금지된 일기장>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1911~1997)가 1952년 발표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50년대 이탈리아 사회가 여성들에게 요구했던 전형적인 역할이 어떻게 그들의 욕망과 꿈을 억압하고 서서히 소멸시켜 왔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주인공 발레리아는 43세의 평범한 중산층 여성이다. 남편 미켈레, 아들 리카르도, 딸 미렐라와 함께 살아가던 그녀의 일상은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충동으로 일기를 쓰게 되면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산책 도중 담배 가게 앞에 쌓인 공책 더미를 발견한 발레리아는 갑작스러운 호기심에 이끌려 공책을 산다. 당시 공책은 정책상 휴일 판매가 금지된 품목이었지만, 발레리아는 담배 가게 주인을 설득해 공책을 손에 넣는다. 단순한 충동에서 비롯된 이 행동은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 묻어둔 욕망을 일깨웠고, 결국 일기를 쓰기 시작하며 그녀의 삶은 완전히 변모한다.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온 발레리아는 일기를 통해 스스로 뚜렷이 인지하지 못했던 결혼생활의 위기,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는 모성의 버거움,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마주한다. 그가 일기를 쓰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속한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일기장을 안전하게 보관할 서랍 하나 없는 현실 속에서, 남편과 아이들은 그녀가 일기를 쓸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남편은 발레리아가 밤늦게 글을 쓰는 모습을 보고는 “다른 남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라고 의심할 정도였다. “내게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잘못된 감정에 빠져 있다고 믿기가 더 쉬웠던 거다.”
발레리아는 첫날의 일기에서 강렬하게 선언한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기 쓰기가 그의 일상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자 발레리아는 불안감을 느낀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려면 되도록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해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 곁에 있으면 나다운 균형감을 되찾지만,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넋이 나간 듯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발레리아는 일기장을 “사악한 악령”으로 여기면서도 이를 멈추지 못한다. 내면의 고백이 쌓여갈수록 그녀는 본질적인 질문들에 마주하게 된다.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아내와 어머니로 사는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일기를 쓰는 동안 발레리아는 집안에서의 불공정한 현실을 깨닫는다. 일요일마다 가족들이 늦잠을 즐기는 동안 자신만이 집안일을 시작하는 상황에 분노를 느끼고, 직장 생활이 단순히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생각 역시 틀렸음을 인정한다. 딸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는 직장에서의 일이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동시에, 남편과의 관계는 오래전에 끝났음을 깨닫고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발레리아의 일기는 단순히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하는 여정만은 아니다. 그녀는 권위적으로 여자 친구를 대하고, 자기보다 똑똑한 여동생을 깎아내리며 여성을 경멸하는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반면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딸에게는 반감을 품고, 딸의 일기장을 집착적으로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발레리아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도 그 체제를 답습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지닌 인물로, 억압받으면서도 저항하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러나 결국 발레리아는 딸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며 말한다. “이 집은 거짓과 불행으로 가득한 것 같아.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테니, 엄마가 오늘 이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너는 능력이 있으니 네 살길을 찾으렴. 최대한 빨리 이 집을 떠나.”
결말에 이르러, 발레리아는 가족 안에서 새롭게 부여된 역할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울타리를 깨고 나아갈 것인지 갈림길에 선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단순히 머무르거나 떠나는 양자택일에 그치지 않는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발레리아의 여정은 보다 깊고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작품은 70여 년 전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오늘날의 사회적 분위기와 다소 차이가 있음에도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성차별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일기라는 형식은 화자의 내밀한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따라가며, 독자에게 자신의 일상과 내면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 ‘기록’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다시금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