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어긋난 보통의 나날들

2025-01-16

가까운 이의 ‘상실과 부재’ 겪고

계속 살아가는 남겨진 사람들

비틀린 일상 속에 내재된 슬픔

서울 오아시스

김채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266쪽 |1만6000원

동우, 석용, 성아는 친구 유림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철 광고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네 사람이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네다. 하지만 그들은 유림과의 기억을 떠올리거나 유림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저 같이 걸을 뿐이다. 기억들이 선명히 떠오를 만한 장소들은 일부러 피하는 듯도 하다. “농구대가 눈앞에 나타나면, 농구대의 둥근 테에 매달린 과거의 기억들을 새롭지 않게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탈구된 팔다리. 체육 시간. 푸른 뜰. 철봉들. 작은 아코디언. 배앓이. 식곤증. 포도당 알약들. 그러나 세 사람은 거기까지 걷지 않았다.” 이들은 유림이 살았던 원룸에 유품들을 정리하기 위해 역으로 가다가 누군가 예약해 둔 택시를 발견한다. 그리곤 우발적으로 택시를 빼앗아 타고 얼굴도 모르는 예약자가 설정해둔 목적지까지 가기로 한다. “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순서 없이 구경하고 나서 본 것들을 전부 잊어버”리며 다가올 시간을 유예하듯 정처없이 걷는다.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채원 소설가의 첫 소설집 <서울 오아시스>가 출간됐다. 이 책에는 총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작품은 상실 혹은 누군가의 부재로 인해 어긋나 버린 세계의 감각을 섬세하게 탐구하고 있다. 각각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히지만, ‘상실’과 ‘부재’라는 소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연결돼 있어 연작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는 자살한 친구의 부고를 들은 세 친구가 장례식장이 아닌 어딘가로 끊임없이 걸어가며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의 대화는 어딘가 어긋난 듯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독자는 그들의 미로 같은 동선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따라가며 익숙한 독법으로 죽음의 원인이나 언어로 표현된 선명한 슬픔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소설이 전개될수록 독자가 마주하는 것은 자명한 서사가 아닌 상실의 슬픔이 세계를 비틀어 버리고 난 후 남겨진 감각 같은 것들이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 덥지 않아?” 같은 평소와 같은 질문들을 나눌 뿐 “어떻게 이런 상태를 계속 견딜 수 있는지. 한 번도 원해본 적 없는 시간이 뒤범벅된 얼굴로 온종일 난간에서 떨어지는 공상에 빠지면서도 어떻게 두 발을 움직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을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을 묻지 못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동우, 석용, 성아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썼다. 자살한 친구 유림이 이내 쉴 수 있도록 그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빛 가운데 걷기’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 완전히 소진된 상태에서도 기어이 몸을 일으켜 살아가는 남겨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노인은 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뒤 “완전히 고갈되어버렸고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김미정 문학평론가)”이지만, 딸이 남기고 간 초등학생 손주를 돌봐야 하기에 하루하루의 일과를 이어나간다. 과거 교사였던 그는 손주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손주는 언어 발달에 어려움이 있고 학교에서는 손주를 문제 학생으로 간주한다. 시간이 지나며 손주가 등교를 거부하는 날이 잦아져도 노인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손주를 믿는다. 딸에 대한 미움이나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올 때도 그는 이 감정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때로는 몇 장의 책을 읽기도 하고 과거 자신의 수업 노트와 주기율표를 되새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손주를 학교에 보내고 간식을 챙겨주며 손톱을 깎아주는 등 하루하루 실천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해낸다. 소설의 후반부 ‘열려 있는 문’을 찾아 걷는 노인의 모습은 고갈되고 소진되었음에도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모습처럼 읽힌다. “노인은 양 무릎을 펴고 그만 일어나 문이 열려 있는 건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한낮이었으니 찾을 수고도 없이 많은 건물의 문이 열려 있었지만 노인은 밀거나 당길 필요 없이 완전하게 열어둔 문을 찾고 싶었다.”

상실과 부재를 다루는 이 소설집은 가까운 이의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이 그 시간을 견디고 지속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슬픔이나 비통함의 정서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등장인물 간의 대화가 마치 배경음처럼 흘러가기에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게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상실과 부재로 세계가 어긋나버린 순간, 언어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여덟 편의 소설에 대한 짧은 설명을 덧붙이며,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붙들고 있던 질문과 주제의식을 공유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문장과 묘사가 섬세하고 아름다워 어떤 부분은 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