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모스크바 1979

2025-08-22

김대중 대통령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질문을 하여 주변을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있었다. 특히 시간 여유가 있었던 야당 시기에 몇 차례 그런 일을 겪은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물으시는 것이 러시아 이야기였다.

러시아는 국토도 넓고 자원도 풍부한데, 자연 자원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도 훌륭하다. 자연 과학과 공학 기술 영역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이나 문학 분야에도 업적들이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런데 왜 늘 형편이 어려운가?

소련 시절 일반인 생활수준 열악

개선 위한 항의나 시위조차 없어

특권층에 대한 비판 의식도 결여

어떤 체제이건 비판과 대안 필요

제정 러시아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다. 급기야는 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희망찬 시작이 있었다. 당시 세계의 지식인 중 이때를 새 문명의 시작이라고 큰 기대를 거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새로운 실험의 부정적인 면이 노출되면서 급기야 내부의 모순으로 스스로 붕괴하고 말았다. 그 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개혁을 시행했고 많은 이들이 이제 러시아가 정상적인 발전을 이룩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기대하던 것과 달리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가.

얄팍한 지식을 동원하더라도 전문 용어가 들어가는 긴 강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짧고 간단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답이 있어야 했다. 문득 십수 년 전에 소련에 한 달가량 머물던 기억이 떠올랐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은 세계정치학회를 모스크바에 초치하려 했고 학회 측은 논문을 제출하는 학자에게 국적을 불문하고 입국사증을 발급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 덕에 정치학자 몇 분과 함께 소련 방문 기회가 주어졌다. 그 당시로선 특이한 경우였고, 북한 측에서 여러 차례 소련 정부와 당에 때로는 거칠게 항의하며 이를 막으려 했단 이야기도 있었다.

소련에 관한 관심은 일찍부터 있어서 재학 시절 틈틈이 러시아어 공부를 했고 언어학 전공 친구와 함께 개인 교습을 받아 단편 소설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소련에 대한 당시 내 생각은, 가장 합리적 이론 체계를 갖춘 권력 정예들이 이 이념에 근거해 정당성과 권력을 전유하며, 그 덕으로 엄청난 성과를 이룩해 단시일 내 미국에 맞서는 초강대국이 됐다는 것. 독재 체제지만 빈부차가 없고, 사상이나 문화면에서 자유가 억제되지만, 퇴폐 현상은 없으며 일반인의 생활은 건실하다는 정도였다.

현지의 실상은 이런 내 생각을 비껴갔다. 일단 학회 개최는 성공적이었다. 큰 규모의 회의라 혼란도 있었고 특히 미·소 두 초강대국 학자들 간 충돌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발표가 있는 패널 외에 되도록 많은 토론에 참여했다. 그때 만난 소련 학자 중에는 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역할 한 분들도 있고 그중 몇 분은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갔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측근 게오르기 샤흐나자로프는 가깝게 지내 나의 논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출판도 해 주었다. 폐회식은 일찍이 학회에서 본 적이 없는 성대한 것이었고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나와 소련의 업적과 세계적 문제에 관해 긴 강연도 가졌다.

그러나 현지 길거리에서 마주한 현실은 이 연설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일반인의 생활 수준은 상상 밖이었다. 이것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초강대국의 현실인가라고 할 정도로 믿기 힘들었다. 일반인들은 매일 별 신통치 않은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서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은 일반인의 자세였다. 항의나 시위 등으로 현실을 개선하려는 의지는 없고 어떻게 이 체제 내에서 규제의 틈새를 이용해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가가 주된 관심 같았다.

모두가 엄청난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номенклату́ра)에 관해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현실에 대한 시정이나 비판의 노력은 없었다. 대신 사람을 웃기게 하는 기막히게 훌륭한 해학들이 많았다. 관리나 지식인들은 이런 문제에 관한 대화를 꺼리거나, 서방을 비판하고 자국 체제를 옹호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외국인을 만나면 우선 외제 물건들을 갖고 있는가? 외화를 공식 환율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바꾸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일상적인 대화의 시작이었다. 저녁 무렵 붉은 광장에는 호객하는 여인들이 많았고 대부분 고등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일부 특권층들만 출입하는 특수 상점 베료즈카(Берёзка)에 가려면 외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번은 어떤 여학생에게 크렘린을 가리키며 저곳에는 누가 사는가 하고 짐짓 물었더니, “×××들”이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김대중의 질문에 간단한 답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지도자일수록 현실에서는 지속적인 작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기 쉽다. 어느 나라 어느 체제이건 예외일 수 없다. 어떤 권력체제이건 늘 어느 한 켠에 비판과 대안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 평소 비판과 개혁을 두려워하고 억압하는 나라는 언젠가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존 틸럴리 장군 일화가 생각났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상원 청문회에 나갔던 이야기를 해줬다. 의원이 물었다. “한국에 시위가 자주 있다는데 걱정이 없는가?” 장군이 답했다.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시위를 못 하게 되면 그때는 염려할 것입니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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