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조 펀드’ 나눠먹기 안 되려면

2025-08-18

“솔직히 규모만 봐도 좀 애매합니다. 1000조원이면 모르겠지만….”

새 정부 출범 직후 한 벤처기업인에게 ‘100조원 국민펀드’로 인공지능(AI) 강국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그는 IT 분야에서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대표적인 유니콘 기업을 키워낸 대표적 창업가다. 100조원도 현실성이 있나 싶은데 1000조원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 이제라도 AI 산업 경쟁에 제대로 뛰어들 요량이라면 잠재적 경쟁 상대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요즘 미국의 빅테크 한 곳이 AI 인프라 건설을 위해 분기당 쏟아붓는 자금이 20조원”이라며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투자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시스템을 만들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투자 대상, 조달 방식 새롭지 않아

지역펀드 등 정무적 고려 흔적도

전략 분명히 해야 민간 호응할 것

실제 요즘 글로벌 빅테크들이 AI 전장에서 벌이고 있는 ‘쩐의 전쟁’을 보면 그 규모에 기가 질린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 페이스북의 모회사 메타 등 미국의 빅테크 4곳이 올 한 해 AI 분야에 쏟아부을 돈만 3440억 달러(약 478조원)에 달한다. 미국과 AI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알리바바 한 곳에서만 매년 80조원을 앞으로 3년간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자금력을 앞세운 글로벌 기업들의 인재 확보전도 불이 붙었다. AI 엔지니어를 모셔오기 위한 경쟁을 현지 언론은 미국 프로농구(NBA)의 스카우트 경쟁에 비유할 정도다. 이런 어마어마한 구심력에 얼마 안 되는 국내 인재들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도 처음 공약을 제시할 때 100조원이란 펀드는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미국·중국을 맞상대하기란 자금력이나 기술 양면에서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그래도 정부 주도 펀드를 마중물 삼아 민간 투자를 최대한 끌어낸다면 아마도 특정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는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순발력 있게 대응하느냐일 테다.

그런 면에서 국정기획위원회가 지난 13일 내놓은 ‘국민성장펀드’ 계획안은 솔직히 실망스럽다. 투자 대상 선정이나 자금조달 방식이 과거 정부들이 해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다. 국정위는 산업은행의 첨단산업전략기금을 활용해 50조원을 조달하겠다고 했다. 이는 이미 전임 정부에서 추진하던 것이다. 투자 대상 역시 AI뿐 아니라 미래차·2차전지·반도체·로봇·방위산업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투자 대상도 이전 정부에서 발표한 것과 다르지 않다.

국정위가 새롭게 제시한 건 ‘미래성장펀드’다. 펀드를 상장해 일반 국민의 자금도 모으겠다지만 기본적으로 금융권과 연기금 등이 출자금을 대는 형태다. 하지만 당장 돈 나올 데가 은행권 정도일 테니 금융당국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금융감독원장 내정자가 연일 ‘생산적 금융’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이 역시 예전부터 익숙히 보던 그림이다. 여기에 국정위가 제시한 모델에는 지방에 고루 투자하는 ‘5극3특 지역펀드’ 등 정무적 냄새가 짙은 사업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물론 정부가 주도하는 투자이니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AI 같은 전략산업을 제대로 키우려면 선택과 집중은 불가피하다. 빅테크들도 그렇게 한다. 천문학적 투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사업은 과감하게 구조조정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정부의 마중물마저 부족한 상황이다. 이재명 대통령 스스로 “봄에 뿌릴 씨앗조차 없다”며 나라 곳간 사정을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

공은 국정위의 손을 떠나 이제 정부에 넘어갔다. 무엇보다 필수적인 민간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투자 전략과 목표도 가다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한번의 ‘나눠먹기’로 끝날 것이란 우려를 불식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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