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없는 나무, 원화 스테이블코인 [기자의 눈]

2025-08-18

“그날 계엄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지금처럼 빠르게 굴러갔을 리 만무하죠.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의 위기가 금융의 혁신을 앞당긴 거예요.”

가상화폐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우스갯소리로 나누는 대화다. 석 달 전만 해도 요원하던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이제는 정부의 가장 뜨거운 현안으로 떠올랐다. 조기 대선에 나선 이재명 당시 후보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공습을 막고 통화 주권을 지키자는 공약을 내면서부터다. 시큰둥하던 전통 금융권도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해외 기업과의 협업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렇게 서둘러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심으려는 토양이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된 황무지라는 점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유통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어떤 블록체인에 올릴지가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어야 하지만 국내 논의에서 이 부분은 번번이 비껴갔다. 도입 필요성을 외치는 국회에서도 정작 발행 기반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한 업계 전문가는 “미국이 발행 규정에 ‘개방형(퍼블릭) 네트워크’를 명시한 것과 대조적”이라며 “양국의 연구·검토 수준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자조했다.

스테이블코인으로 통화 주권을 지키려면 블록체인 생태계의 현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뿌리가 될 가능성이 큰 이더리움·트론 같은 글로벌 주요 블록체인의 검증 주체(노드) 절반 이상은 미국과 중국에 집중돼 있다. 반면 국내에서 노드를 운영하는 밸리데이터는 손에 꼽을 정도다. 통화 주권을 내세워 이 위에 원화를 찍어내면 역설적으로 해외 사업자들에게 원화 통제권을 쥐어주는 꼴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블록체인과 불가분의 관계인 가상화폐를 ‘사기’로 치부하며 육성에 소홀했던 정책 당국의 탓이 크다. 거래소를 제외하면 블록체인 관련 산업은 여전히 생소하고 규제 환경은 불확실하다. 해외와 달리 법인 계좌가 금지된 탓에 밸리데이터들은 블록 검증으로 얻은 보상을 현금화하기조차 어렵고 회계·과세 기준도 정립되지 않았다. 국내 산업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블록체인 인프라 산업 육성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제도적 정비가 필요한 이유다. 지금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진정성을 가지려면 열매만 말할 게 아니라 뿌리부터 살펴야 한다. 뿌리를 방치한 채 나무가 무성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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