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가와 전쟁 중인 중국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은 경제의 활력을 앗아간다. 물가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물건 사기를 꺼린다. 가격이 더 내려갈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소비가 줄어들면 기업은 생산 감축에 나설 수밖에 없다. 생산이 줄면 기업 수익도 줄고 고용과 임금 감소로 이어진다. 일자리와 임금이 줄면 내수 부진을 야기하고 경제 침체가 심화한다. 악순환이다.
경기 개선을 위해 중앙은행이 시중에 자금 공급을 확대해도 실물 경제로 돈이 흐르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불확실성이 커지며 ‘대차대조표 불황’도 빚어진다. 가계 등 경제 주체가 먼저 빚(부채)을 갚고 저축을 하며 소비를 줄이는 탓에 내수 위축이 심화하는 것이다. 각국 정부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보다 디플레이션을 더 두려워하는 이유다.
생산자 물가, 35개월 연속 하락
GDP 디플레이터 9분기 마이너스
부동산 위축에 줄어든 소비 여력
과잉 생산으로 출혈 경쟁도 심화
‘판네이쥐안’‘공급 개혁 3.0’으로
가격 경쟁과 공급 과잉 억제 나서

중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올해 상반기(1~6월) 중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와 생산자물가지수(PPI) 상승률(전년동기 대비)은 각각 -0.1%, -2.8%를 기록했다. PPI의 경우 지난 7월(-3.6%)과 8월(-2.9%)에도 뒷걸음질을 이어가며 35개월 연속 하락 행진했다.

국내총생산(GDP)에 포함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 가격 변동을 반영해 한 나라의 종합적인 물가 수준을 보여주는 GDP 디플레이터는 2023년 2분기부터 지난 2분기(-1.3%)까지 9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최장 기간 부진 기록이다. 연간 기준으로는 GDP 디플레이터가 2023년(-0.51%) 14년 만에 마이너스로 전환한 뒤 지난해(-0.71%) 하락 폭은 더 커졌다.
개혁·개방 이후 최장 디플레 기록
중국이 디플레의 늪에 빠진 건 무엇보다 수요 부진 탓이다. 2021년 헝다(恒大·에버그란데) 그룹 파산 이후 부동산 시장 부진이 이어지면서 자산 가격 하락 여파로 소비가 위축됐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중국의 부동산 소득 성장율은 2023년 4.2%에서 2024년 2.2%로 낮아졌다. 중국 GDP의 25%를 차지하는 부동산의 부진은 경제에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소비 여력도 떨어지고 있다. 2023년 7.1%였던 임금소득 증가율은 지난해 5.8%로 떨어졌다. 가처분 소득 증가율도 코로나19 이전 7%에서 지난해 5.1%로 둔화했다. 알뜰 소비도 트렌드가 됐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화장품과 커피 등의 저가 구매 인증이 확산하는 등 ‘소비 다운그레이드(消費降級)’가 유행하고 예비적 저축도 늘어나는 모습이다.
소비 촉진을 통해 물가를 끌어올리려고 중국 정부가 돈을 풀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중국 정부는 올해 이구환신(以舊換新·새 제품으로 교환) 보조금으로 3000억 위안(약 59조원)을 푼다. 지난해의 2배 규모로 상반기에만 1620억 위안(약 32조원)을 집행했다. 보조금 지급으로 가전제품 등의 소비는 늘었지만 지난 1~5월 가전제품 가격은 1.5% 떨어졌다. 소비재 물가도 0.4% 하락했다. 업체 간 가격 경쟁이 과열된 탓이다.
이처럼 중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수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출혈 경쟁인 ‘네이쥐안(內卷·involution)’ 때문이다. ‘안으로 말려들어 간다(내권)’는 의미의 네이쥐안은 원래 인류학 용어로 내부 경쟁이 치열하지만 생산성은 개선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제 살 깎아 먹기 가격 경쟁부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장시간 근로, 보여주기식 야근까지 소모적인 비생산적 경쟁을 총칭한다.
지난 5월 자동차 업계의 가격 할인 경쟁이 네이쥐안의 대표적 사례다. 세계 최대 전기차 생산업체인 BYD가 주요 모델의 가격을 최대 34% 낮추자 업계 전체가 줄줄이 가격을 인하했다. 신차를 판매 처리하고 이를 중고 시장에 내놓으면서 사실상 새 차인 ‘주행거리 0㎞ 자동차’가 중고차 시장에 대거 풀렸다. 하청업체에 대금 지급 등이 지연되며, 자동차 업체의 연쇄 도산 우려까지 커졌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간 판매 경쟁도 네이쥐안의 또 다른 예다. 광군제(11월 11일)와 함께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 행사로 꼽히는 ‘618 쇼핑 축제’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며 역대 최장기간 진행됐다. 징둥과 알리바바 등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 일부 판매자는 고객 확보를 위해 역마진 상품까지 판매했다. 중국 소매판매에서 온라인의 비중이 27% 정도임을 감안하면 디플레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물가 하락을 부르는 네이쥐안의 근저에는 중국 경제의 만성 질환과도 같은 공급 과잉이 있다. 공급 과잉을 초래한 건 부동산 및 수출과 함께 중국 경제 성장 엔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제조업 투자다. 중국 정부가 제조업에 쏟아부은 막대한 보조금이 공급 과잉을 야기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중국의 산업 보조금은 기업 매출액 대비 4.5%에 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0.7%)의 6배에 이른다.
‘이익 없는 성장’ 공포 커지는 중국
쏟아지는 정부 보조금에 특정 업종으로 쏠림 현상이 벌어졌고, 경제성과 무관하게 기업이 설비를 급격히 늘리며 과잉 생산으로 이어졌다.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철강, 정유 등이 공급 과잉으로 네이쥐안에 빠져 디플레이션을 이끄는 업종이다. 이들 업종의 공급 과잉은 상상을 초월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태양광의 경우 중국의 공급이 전 세계 수요의 2배, 전기차 배터리는 1.3배 수준이다.
공급 과잉은 재고 증가로 이어졌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중국의 올해 4월 산업재고는 17조1000억 위안(약 3383조원)으로 1년 전보다 3.8% 늘어났고, 2019년 말보다 43.7% 증가했다. HSBC는 “가격 인하를 통한 재고 소진 노력에도 기업이 과잉 생산에 의존하며 악순환이 지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요 부진에 공급만 늘면서 블룸버그는 “이익 없는 성장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급 과잉과 출혈 경쟁, 그에 따른 디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중국 정부도 칼을 빼 들었다. 과도한 가격 경쟁 자제와 산업 내 공급 과잉을 억제하기 위한 ‘판네이쥐안(反內卷) 캠페인’에 나섰다. 이를 위해 불공정 경쟁법과 가격법 개정안도 마련했다. 이런 분위기 속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1일 중앙재경위원회 회의 발표문을 통해 기업의 무질서한 가격 경쟁에 대한 규제와 단속을 강조했다.
“자원 배분 왜곡, 중국 GDP 2% 낮아져”
정부의 서슬 퍼런 기세에 과도한 가격 경쟁에는 제동이 걸렸다. 지난 7월 중국 자동차 업계는 할인율을 축소했고, 음식 배달 플랫폼도 할인을 자제했다. 감산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세계 1위 전기자동차 배터리 제조업체인 CATL은 지난 8월 전 세계 생산량의 3%를 차지하는 초대형 리튬 공장의 가동을 3개월간 중단했다.

공급 과잉을 막기 위한 설비 폐쇄와 증설 중단도 이어지고 있다. 공급 과잉에 시달리는 태양광 분야의 경우 폴리실리콘업계가 500억 위안(약 7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중국 태양광 생산 능력의 3분의 1을 매입한 뒤 폐쇄하기로 했다. 중국의 배터리 분리막 기업 8곳은 향후 2년간 신규 증설을 중단하기로 했다. 중국 기업은 전 세계 분리막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공급 과잉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나선 건 단순히 디플레이션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만연하는 비효율적 투자가 중국의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이라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의 산업 정책이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있다”며 “자원 배분 왜곡으로 중국의 생산성이 1.2%, GDP는 2% 낮아졌다”고 추정했다.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고 공급 과잉을 해소하기 위한 중국의 선택은 경제 구조 전환과 산업 구조조정이다. 이른바 ‘공급 개혁 3.0’으로 ‘판네이쥐안 캠페인’이 그 전초전인 셈이다. 삼성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이번 달 개최될 4중 전회 전후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며 “국유기업 개혁(1998~2002년)과 공급 측 개혁(2015년)에 이은 개혁개방 이후 세 번째 공급 개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시장이 예상하는 개혁 방향은 ‘제조업 고도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첨단 기술과 내수 중심의 성장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다.
삼성증권은 ‘공급 개혁 3.0’은 무조건적인 설비 감축보다는 신규 투자를 줄이고 보조금을 축소하는 등 구조조정 방식을 취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쟁력을 확보한 상위 업체를 주축으로 산업을 재편하면서 차이나 테크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제조업 고도화’ 통한 경제 구조 전환
다만 개혁을 완수하기에는 상황이 만만치 않다. 2015년 공급 측 개혁 시기에는 국영기업이 과잉 생산을 주도해 정부 개입이 용이했지만 현재는 민영기업이 과잉 생산과 그에 따른 가격 경쟁을 주도하는 만큼 정책 효과가 지연될 수 있다. FT에 따르면 태양광의 95%와 배터리의 65%를 민영기업이 생산·공급하고 있다.
감산과 폐쇄 등 생산 능력 조정이 야기하는 성장률 하락과 실업 증가의 충격을 흡수할 대내외 경제 여건이 충분치 않은 것도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중국 경제의 엔진 역할을 담당했던 부동산과 수출이 산업 구조조정의 충격을 줄일 완충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서다. 디플레이션 극복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주요 투자은행(IB)은 중국의 저물가 기조가 향후 1~2년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국제금융센터의 김기봉·이치훈 연구원은 “대규모 구조조정과 관련한 충격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산업 개편에 따라 첨단산업의 생산성이 회복되면서 전통 산업의 부진을 상당 부분 상쇄하고 기업 간 양극화도 어느 정도 해소할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