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날개 단 대만, 부활하는 일본…한국만 위태롭다 [신 재코타 시대]

2025-12-10

미·중 패권 전쟁을 기점으로 동아시아 ‘재코타(JaKoTa, 일본·한국·대만)’ 트라이앵글의 경제 지형이 바뀌고 있다.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분야에서의 압도적 경쟁력을 앞세운 대만이 약진하면서다. 일본 또한 ‘잃어버린 30년’의 늪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만 ‘나 홀로 위기’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대만 재정부에 따르면 대만의 11월 수출은 전년 대비 56% 증가한 640억5000만 달러(약 94조2000억원)를 기록했다. 15년6개월 만에 최대 폭의 증가다. 사상 처음 월 수출 600억 달러 시대를 연 지난 10월(618억 달러) 기록을 훌쩍 뛰어넘었다. 11월까지 누적 수출은 5784억9000만 달러(약 851조원)에 이른다. 연간 수출 전망치는 전년 대비 35%가량 증가한 6400억 달러다. 수출 5000억∙6000억 달러 장벽을 동시에 깨는 역사적 행보다.

수출 호조를 견인한 건 반도체다. 인공지능(AI) 시장의 가파른 성장에 최첨단 칩 생산 능력을 갖춘 TSMC를 중심으로 수요가 폭발했다. 애플∙엔비디아∙브로드컴∙AMD 등 대부분의 글로벌 빅테크가 TSMC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사실상 생산만 하면 모조리 해외로 팔려나가는 형태다. 대만 재정부 관계자는 “데이터 센터 등 인프라 구축 속도가 빨라지고, 각국 정부도 주권 AI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하드웨어 수요가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코타(JaKoTa)는 동아시아의 일본(Japan)·한국(Korea)·대만(Taiwan)을 묶은 말로 199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글로벌 투자은행 등이 3국을 ‘민주주의+고도 기술+제조업 강국’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새로운 경제 블록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재코타 3국은 공통점이 많다.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단일민족국가로 지리적으로는 실질적인 섬나라다. 제조업 기반 수출 경제로 중국이라는 세계 최대 시장에 인접한 이점을 이용,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며 '재코타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미·중 패권 전쟁이 본격화하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되는 과정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한일이 전통적 수출 시장인 중국에서 제조업 경쟁력을 잃고 주춤한 사이 대만은 파운드리를 무기로 미국 활로를 개척하면서다.

대만에 TSMC라는 굴지의 반도체 기업이 탄생한 건, 일찌감치 정부 주도로 ‘파운드리’ 한 우물만 파는 전략을 폈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대만 정부는 '중소기업 중심 다품종 소량'에 머물던 경제 체질을 강력한 산업 정책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는 TSMC가 있어 가능했다. TSMC를 기반으로 서버 조립과 패키징 등 후공정과 하드웨어 전반으로 낙수 효과가 퍼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대만엔 가뭄인데도 농업용수를 반도체 공장에 먼저 투입할 정도로 정부 차원의 총체적인 지원을 쏟았고,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반도체 선두주자였던 일본이 2000년대 한국에 추격을 허용했고, 이제는 한국이 대만의 추격에 긴장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대만의 달라진 위상은 수치로 입증된다. 대만 정부는 이달 초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7.4%로 상향 조정했다. 지난 8월 전망치 대비 2.9%포인트 높여 잡은 것으로 이는 2010년(10.3%) 이래 최고치다. 아시아개발은행(ADB)도 10일 대만의 경제성장률을 지난 9월 대비 2.2%포인트 상향한 7.3%로 전망했다. 한국(0.9%, ADB 기준)은 물론 일본(1.1%)과 격차가 크다.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율도 13.8%로 한국(4.8%)과 일본(3.9%)을 압도한다.

대만의 올해 수출액 전망치(6400억 달러)는 한국의 약 90%에 달한다. 2016년까지만 해도 대만의 수출액은 한국의 절반 정도였는데 불과 10년 만에 턱밑까지 쫓아왔다. 1인당 GDP(달러 환산)도 지난해 일본을 앞섰고, 올해는 한국마저 제칠 게 확실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는 전년 대비 0.8% 줄어든 3만5962달러다. 반면 대만의 1인당 GDP는 3만7827달러로 예상된다. 전망이 현실화하면 한국은 2003년 대만을 제친 이후 22년 만에 역전을 허용하게 된다.

대만의 가파른 추격에 긴장하는 건 한일 모두 마찬가지지만 그나마 일본은 오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인다. 기업 실적 회복을 바탕으로 2021년부터 뚜렷한 수출 회복세가 나타나고 있는데 저금리를 활용하려는 글로벌 유동성이 몰려들면서 증시도 활황이다. 아베노믹스 계승을 천명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취임 이후 반도체 재건과 방위 산업 육성 등 신규 정책 효과에 대한 기대도 크다. 노무라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다카이치 내각은 ‘엔저’와 ‘재정 확대’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명확히 제시했고 이는 일본에 대한 투자 매력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사정은 다르다. 한국은 올해까지 3년 연속 2% 미만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전망대로면 올해 한국의 성장률은 1998년 이후 27년 만에 일본과 역전된다. 올해 연간 수출액이 사상 처음 7000억 달러(약 1030조원)를 돌파할 거란 장밋빛 전망이 나오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수출은 전년보다 오히려 줄었다.

김미승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대만이 반도체 전 공정에 걸친 생태계를 구축하면서 수요에 신속히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춘 반면, 한국은 공급망 다변화와 생태계 확장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반도체 수출 실적이 좋아 보여도 메모리에 편중된 탓에 글로벌 경기 변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반도체 편중은 대만의 의도적인 반도체 ‘올인’과는 성격이 다르다. 2000년대 경제 성장의 가장 큰 버팀목이던 ‘중국 특수’가 사라지면서 철강∙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이 경쟁력을 상실했고, 반도체만 남아 버티는 형국이다. 성장의 또 다른 축인 내수 또한 부진의 골이 깊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부터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실질소득 감소와 높은 생활물가 상승률 등이 맞물린 탓에 간단치 않은 문제다.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가 잠재성장률을 끌어내리며 복합적인 악재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상황을 한국 경제의 마지막 골든타임으로 본다. 일본은 기축통화국으로 장기간의 침체를 버틸 체력이라도 있었지만 한국은 제대로 된 처방이 없으면 향후 치명적인 저성장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만이 급속히 성장한 최근 10년간 한국은 두 차례 큰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실기했다”며 “산업 재편과 함께 노동개혁 등 해묵은 과제 해결을 더는 늦춰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소장은 “어차피 세 나라 모두 반도체에 명운 걸었고, 결국은 1등이 독식하게 될 것”이라며 “속도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공장을 짓는 게 관건인데 세액공제 수준이 아닌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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