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에 따랐을 뿐!?
에밀리 A 캐스파 지음
이성민 옮김
동아시아
벨기에 겐트대(정확한 표기는 헨트대)의 실험심리학 교수인 지은이는 2016년부터 르완다와 캄보디아를 찾았다. 사회‧인지신경과학 박사로 ‘도덕 및 사회적 뇌 연구실’을 이끄는 지은이가 이런 학살현장을 찾은 이유는 잔학행위의 원인을 뇌과학적‧심리학적으로 밝히기 위해서였다.
주목되는 점은 가해자들이 한결같이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전범과 인도주의 범죄 혐의자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수없이 되풀이됐던 변명이다. 결국 잔혹한 학살자는 ‘악마’가 아니라 공감‧죄책감‧주체성이 떨어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다. 한나 아렌트가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보고 내놓은 ‘악의 평범성’ 개념이 재확인되는 순간이다.
문제의 핵심은 뇌가 어떻게 작동하기에 명령‧지시를 받으면 이성적‧합리적 판단을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고 그냥 따르느냐에 있다. 심리학‧뇌과학 연구를 하면서 지은이는 1961년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스탠리 밀그램 교수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을 근거로 삼았다.
이 실험은 40명을 교사와 학생 역할로 나누고, 문제를 낸 뒤 틀린 학생 역할 피실험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결과는 인간 도덕성 확인이라는 원래 의도와 반대로 나타났다. 특별한 협박이나 설득이 아닌 단순 지시를 했는데도 교사 역할 피실험자의 65%가 위험한 수준인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밀그램 교수는 상황이 주어지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윤리적‧도덕적 요구를 무시하고 명령을 핑계로 잔혹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인간 행동, 동기부여를 담당하는 뇌 변연계(Limbic system)는 타인의 고통‧괴로움을 육체적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감정적‧정서적 느낌만 일부 피상적으로 공유하기 때문에 명령이나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 이는 잔혹행위는 물론 외부와 공감하지 않는 특정집단 내부의 반사회적 신념‧행동과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미국‧유럽 극우파들은 이민자들이 기존 사회의 경제적 이익과 질서‧전통‧종교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을 타자화하면서 비방‧억압‧공격을 합리화한다.
중요한 것은 뇌과학적으로 희망의 근거도 엿보인다는 사실이다. 2022년 지은이가 실험대상자들에게 고통스러운 장면과 그렇지 않은 화면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더니 인간 뇌파는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르게 반응했다. 그런 뒤 한 집단에는 공감을 키워 고통을 더 많이 느껴보도록, 다른 집단에는 공감을 낮춰 고통을 덜 느끼도록 노력하라고 각각 주문했다. 그 결과 인간은 명령권자의 주문에 따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신경반응을 조절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명령권자의 뇌에서는 어떤 반응이 벌어지느냐도 중요하다. 지은이는 어떤 지도자는 소속 사회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거나, 자신의 임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시민들에게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황당한 의사결정을 내리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경우 지도자는 ‘도덕적 이탈’이라는 자기조절 메커니즘에 따른다고 한다.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덜 해로운 것으로 축소하고, 타인 고통에 대한 인식을 줄이며, 책임도 최소화한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양심에 거리낌 없이 대놓고 위법행위를 저지르고는 이를 합리화한다.
지은이는 뇌신경학적으로 복종의 메커니즘을 더욱 명확히 밝히면 인간이 주체적 의지를 회복하고 부당한 명령 앞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면서 합리적 판단‧행동을 하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제 Just Following Orders: Atrocities and the Brain Obed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