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품은 채 할매가 되었네

2025-01-30

서울 살 때의 얘기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출근길 지하철역,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플랫폼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소리치는 이는 여든쯤 된 여성이었다. 그제야 그이가 목이 터져라 외쳐 부르는 게 내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까마득히 잊었던 기억 하나가 뇌세포를 뚫고 생생하게 떠올랐다.

영자 언니-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식모살이하던-가 살금살금 우리 방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감옥에 간 뒤 농번기가 되면 엄마는 열 마지기 논농사를 짓기 위해 반내골로 들어갔다. 나는 열흘쯤 혼자 밥을 지어 먹고 학교에 다녔다. 아홉 살짜리가 혼자 해먹는 밥이 오죽했을까. 영자 언니는 안쓰러웠는지 종종 주인집 몰래 반찬을 가져다주곤 했다. 언니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러다 들키면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와그르르, 그릇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아주머니는 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쌍욕을 해대며 모진 말을 쏟아냈다.

“야 이 도둑년아!”

나는 그때마다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그래서 이 무서운 시간이 금방 지나가기를. 그러나 언니는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맞으면서도 바른말을 성질만큼 쏟아내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남을 음식 쪼까 주는디 그거이 먼 도둑질이대요? 아짐씨는 쩌 어린 것이 불쌍허도 않대요?”

아주머니의 모진 말은 아저씨가 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귀를 두 손으로 틀어막은 채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곤 했다.

<여로>를 함께 보자는 주인집 아들의 손에 이끌려 내가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을 꺼버렸던 아주머니는 어쩌자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내 이름을 외쳐 부르며 다가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얼마 전에 봉게 니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신문에 실렸더라야. 나가 니를 친딸처럼 이뻐했는디, 기억나지야?”

늙어 귀가 먼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듣지 않으려야 듣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또렷했다. 하도 창피해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언젠가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아마 아주머니 욕도 한바탕 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쥔 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부모 잘못 만나 니가 에레서부텀 고생이 많았지야? 미안허다이. 근디 그 아줌씨도 아배 잘못 만나 수월찮이 고생을 했는갑드라.”

아주머니는 부잣집 맏딸이었다. 외가가 부자인 데다 큰딸은 살림밑천이라고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머니는 그 뒤로도 내리 딸만 낳았다. 그 시대의 여느 남자처럼 아주머니의 아버지는 아들을 보려 첩을 들였다. 첩은 보란 듯이 아들을 낳았고 아버지의 사랑은 배다른 남동생에게로 옮겨갔다. 사랑만 옮겨간 게 아니다. 어머니는 또 딸을 낳다 세상을 떠났고, 외가에서 물려받은 재산은 죄 첩 식솔에게 빼앗겼다. 부잣집 딸인데 빈 몸으로 덜렁 시집만 올 정도였다. 아주머니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태어난 막내 여동생이 막 아이를 낳아 산후조리하겠다며 다녀간 뒤, 그 동생을 제 손으로 키웠다며 엄마를 붙잡고 눈물바람을 하며 저간의 속내를 털어놓았단다.

“긍게 월매나 한이 맺혔겄냐. 워치케든 지 것은 손톱 밑에 그러쥐고 안 뺏길라고 발악을 험시로 살았겄제. 긍게 빈 몸으로 시집와서 그만치 재산을 모든 것이여.”

엄마의 변호 덕인지, 더 긴 세월이 흐른 덕인지 이제는 아주머니를 생각해도 예전처럼 가슴이 아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자고 아주머니는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평생 가슴에 끌어안고 산 것일까. 다시는 빼앗기지 않아서 아주머니는 행복해졌을까? 누구나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있을 상처 입은 어린아이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 어린 것을 마음에 품은 채 할매로 늙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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