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찾은 지금

2025-04-07

지난달 어머니 장례를 위해 귀국길에 올랐을 때, 유럽과 한국 사이 시차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언제 어디서나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변하는 줄 알았던 시간은 내가 있는 장소와 환경에 따라 몇시간씩 앞지르거나 되돌아가고 말았다. 변화하는 시간 앞에서 멀미가 났다. 내 몸이 아무리 곧 잠들 시간이라며 수면을 준비한들, 창밖의 해가 그대로 떠 있는 이상 시차는 내 몸을 괴롭혔고 머잖아 두통으로 이어졌다. 개인과 사회의 시간이 해소될 수 없는 이격을 둔 채로 흘러갈 때 나의 시간은 사회의 시간과 불화하며 정상 작동을 포기했다. 시차 속 나는 혼란스러웠다.

유럽과 한국 사이 시차 적응에 어려움을 겪다 문득 최근 한국 사회 내에도 혼란을 일으키는 시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3일과 4월4일 사이의 시차. 비록 지리적 경도 차이에 따른 과학적 시차는 아니지만, 내란이 유발한 역사의 시차는 어그러진 삶의 시간을 견디는 시민들을 낳았다.

4월의 따스한 봄이 왔음에도 12월 혹독한 겨울에 갇혀버린 사람들. 자연의 시간은 나뭇잎 떨어지고 하얀 목련이 피고 지며 초록 잎사귀 피는 모습까지 변화무쌍하게 이끌었을지언정, 사람들은 냉혹한 시간 한가운데 그대로 머물며 시차를 견디고 있었다. 시침이 바뀐들, 달력을 찢었던들, 물리적 세계의 시간이 2024년 지나서 2025년을 향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지난겨울 모습 그대로였다. 오전 11시22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선고가 헌법재판소에서 발음되기 직전까지 한국에 살아가는 이들은 12월3일 다음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시차의 맥락에서 4월4일 우리 사회가 되찾은 것은 비단 민주주의 이념과 법치주의 정신과 같은 사회 거시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기약 없는 정체를 유발한 삶의 시간이다. 얼마 전 우리가 되찾은 것은 우리의 빼앗긴 시간이다. ‘대통령실’의 폭력성으로부터, ‘정부·여당’의 이기심으로부터, ‘대검찰청’의 이중성으로부터, ‘법원’의 주저함으로부터 강탈당한 소중한 저마다의 시간 그 자체.

12월4일부터 4월3일까지 쉼 없이 날짜가 바뀌었음에도 온전한 하루를 인식하지도 체감할 수도 없었던 이격의 날들을 지나온 지금. 12월3일의 다음날로 4월4일을 기억하고야 만 지금. 사회와 삶의 생기를 앗아간 123일의 계엄령의 시차를 감내해야만 했던 우리의 분투 속, 잔혹한 국가 폭력과 내란이 낳은 우악스러운 시차와 뒤따랐던 역사적 수난들을 까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수많은 개인이 내란성 두통과 복통을 감내하면서, 무수한 자영업자가 경제 위기를 견디면서, 이름 없는 공직자들이 국가 폭력의 명령에 저항하면서 되찾은 지금 이 평온한 시간과 하루를 지탱하는 근원을 잊지 않겠다고. 지난겨울 연이은 고난 속에서 스러지지 않고 버티며 되찾은 지금 이 값진 봄의 배경을 기억하겠다고. 저항 끝에 되찾은 한국 사회의 진보하는 역사를 두 번 다시 좌절케 하지 않으리라고. 12·3 내란 이후 벌어진 시차를 부지런히 좁혀가는 지금. 지난 4개월간 미뤄둔 책을 마저 읽는 사람들, 못다 쓴 글을 매만지는 사람들의 고단한 노력을 지켜보며 지연된 봄날의 시간을 피워낸 혹독한 겨울의 저항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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