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춘(立春)이 지난 지 사흘째다. 밖은 매서운 추위가 실력을 발휘하다가 주춤하더니 따스한 햇볕을 살살 뿌리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난 아내는 옷을 껴입고 목도리를 두르더니 마스크를 섰다. 건지산에 갈 줄 알았는데 나물을 캐러 간다고 했다. 가련산 부근 양지쪽 밭으로 간다는 게다. 작년에 같이 가서 캔 밭일 성싶었다. 한 시간이 나 지났을까, 냉이가 없다며 돌아왔다.
까만 비닐봉지 안의 냉이들은 겨울잠에서 덜 깬 것 같았다. 바로 아내는 냉이를 다듬었다. 냉이의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봄나물 향기 속에는 독이 있는 것도 있다는데 냉이 향은 계속 맡아도 질리지 않는다. 게다가 흙냄새까지 섞어 맡으니, 마치 냉이가 자란 밭에 간 것 같았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판 냉이와는 견줄 수 없다. 그건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게 많아 키가 크고 잎도 넓으며 뿌리도 굵고 길어서다.
내일 아침에 냉잇국을 끓인다고 했다. 뽀얀 쌀뜨물에 손자 태산이 외할머니가 만드신 된장을 풀어서 멸치를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특별맞춤의 밥상이 될 것이다. 아직은 겨울이 버티고 서있는 데도 봄은 우리 집 밥상에 먼저 찾아올 거라 기대가 됐다.
새날이 밝았다. 아내는 아침에 먹을 밥과 국이 있어서 어제 한 말을 잊었을까? 아침밥을 지을 때가 되었는데도 머뭇거렸다. 냉잇국 이야기를 꺼내자, 곧바로 주방으로 갔다.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주방을 채우고 거실로 나왔다. 이어서 김칫국 냄새도 났다. 김칫국물을 넣어야 냉잇국이 개운하다는 게다. 조금 뒤에는 냉잇국의 향이 된장과 김치가 어우러져 거실을 다시 꽉 채웠다. 집안은 온통 냉잇국 냄새로 진동했다.
아침 밥상은 냉잇국이 주인공이다. 냉이의 은은한 향이 혀의 맛봉오리를 건드려 맛을 돋우었다. 밥 한 숟갈에 냉잇국 한 숟갈씩 먹었다. 미처 서너 번도 못 씹어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금방 밥과 국 한 그릇을 비웠다. 저절로 아내의 칭찬이 나왔다.
“여보, 고마워요. 냉이를 캐다 끓인 냉잇국을 먹으니, 올 한 해는 건강하리라 믿어요.”
아내는 두어 번 더 냉이를 캤다. 이번에는 큰며느리가 사 온 전복을 썰어 넣어 끓인 냉잇국은 더 맛이 있었다. 냉이 무침까지 먹었다. 냉이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된장과 마늘, 참깨와 참기름 등 양념을 넣고 버무렸다. 맛 하면 홍어삼합을 말하는 데 냉이의 향과 양념의 맛과 아내의 손맛이 3함이 되어 냉이 무침의 맛을 낸 게다. 오히려 냉잇국보다 향긋한 봄 냄새가 더 진했다. ‘냉 ’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특유의 맛을 지니고 있었다.
아내의 욕심은 끝이 없다. 냉이를 나랑 캐러 가자는 성화가 그치지 않았다. 경칩(驚蟄)이 지나도 햇볕은 따스하지만, 바람결은 사나웠다. 작년과 재작년에 캤던 황방산 서쪽 밭으로 갔다. 냉이는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버렸다. 그 밭은 새 도로가 나고 문화재를 발굴하는 터가 됐다. 서운해서 한 바퀴 돌아보고, 쑥이라도 캐러 황방산 가는 길로 올라가 보았다. 웬일인가? 봄동을 뽑아간 밭인데 작은 냉이와 꽃이 핀 냉이가 있었다. 가뭄에 냉이는 탐스럽지 못했다. 냉이의 향은 한 포기 한 포기 캘 때마다 재미가 쏠쏠해 해 질 녘이 되었다.
냉이를 다듬고 씻는 것이 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입이 귀에 걸렸다. 냉이를 비닐 팩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기도 했다. 전천후로 냉이의 향긋한 봄 냄새를 맡고 싶은 속셈일 거다. 냉이 봄 냄새는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내년 봄까지 갈 것 같다. 내 입가에도 향긋한 봄 냄새 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정석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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