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중국에서 ‘장진호’란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다. 6·25 전쟁 첫해인 1950년 11∼12월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에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격돌한 장진호 전투가 영화의 배경이다. 궁지에 몰린 북한으로부터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참전한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에 매복해 북진하는 유엔군이 오기만 기다렸다.
미국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힐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동해안의 흥남까지 퇴각했다. 이후 유엔군 장병과 피난민들이 배로 북한 지역을 탈출해 남한으로 이동한 것이 저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다. 당시 중공군 개입만 없었다면 한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은 물론 두만강까지 진격하며 남북 통일이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로선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중국 영화 ‘장진호’는 장진호 전투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중공군 장병들의 영웅적 행위를 선전하는 데에만 급급하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됐다는 대목을 쏙 빼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에 부풀어 먼저 북한을 침공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면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이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군을 격퇴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을 구했다는 식으로 전개한다. 6·25 전쟁에서 싸운 여러 당사자들 중 북한, 중국 그리고 미국만 남겨둔 채 한국의 존재는 싹 지워버렸다. 이같은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애국주의 열풍에 힘입어 무려 57억7500만위안(약 1조1600억원)의 수입을 올리며 중국 영화 역대 흥행 순위 2위에 올랐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는 중국인도 무척 많다. 기념관은 장진호 전투와 관련해 참전용사의 육성 증언을 비롯해 다양한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측은 당시 중국의 지배자이던 마오쩌둥(毛澤東) 얼굴 사진을 북한 김일성, 소련(현 러시아)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나란히 게시하며 ‘침략자’라고 규정했다. 마오를 현대 중국을 건설한 영웅으로 여기는 중국인들이 보기엔 다소 언짢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6·25 전쟁 당시 중공군 행태를 소개한 전시물 내용에 불만을 표시하거나 “수정이 필요하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얘기는 이제껏 듣지 못했다. 명백한 ‘팩트’(사실) 앞에 왜곡이 설 자리는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 아닐까.

전쟁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이 4일 주한 중국 대사관을 방문해 얼마 전 한국에 부임한 다이빙(戴兵) 대사와 만났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반중 여론이 급속히 확산하는 와중인데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니 다행스럽다. 다이 대사는 올해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이자 6·25 전쟁 발발 75주년이란 점을 거론하며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제대로 평가하고 한·중 관계가 한 단계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한 중국 대사가 6·25 전쟁 얘기를 꺼낸 점이 눈길을 끈다. 그의 희망대로 “한·중 관계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 등 과거사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중국 측의 전향적 태도를 고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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