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 대구 10·1 사건 등
박헌영 지령으로 발생했다”
학계 통설과 상반되는 주장
“1948년 군 지휘부 25% 좌익”
숙청당한 숫자도 부풀려져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를 옹호하는 영화 <힘내라 대한민국>이 지난 5일까지 4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를 본 윤 대통령 지지자들은 관람평으로 “제주 4·3 사건, 대구 사건, 여수·순천 사건 등 조선공산당의 패악질을 알게 된 ‘필수 관람 영화’” “광복 이후 한국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등 반응을 남겼다.
영화는 실제 역사에 얼마나 가까울까. 전문가들은 <힘내라 대한민국>에 담긴 역사적 내용이 학계 정설과는 거리가 먼 극우적 역사관이라고 입을 모았다.
■ 여운형 테러 배후에 박헌영?
<힘내라 대한민국>에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여운형의 권력투쟁과 함께 “1947년 여운형이 테러를 당해 죽은 배후에 박헌영이 있었다는 추측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통설과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1947년 7월19일 여운형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에서 달리는 차 안으로 난입한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사건 27년 뒤인 1974년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4명이 자백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알려졌다. 사전은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일당은 극우 테러리스트였던 ‘혁신탐정단’의 양근환, ‘백의사’의 염동진에게 무기를 받았다”고 밝혔다.
■ 제주 4·3사건 등을 박헌영이?
<힘내라 대한민국>에는 대구 10·1사건,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이 모두 박헌영의 지령으로 발생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공산혁명이라는 목표를 위해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 사건”이라며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대구 10·1사건은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했던 일이다. 제주 4·3은 1947년 제주에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 무력충돌, 토벌대의 주민 집단 살상으로 희생자가 1만명 이상 발생한 사건이다. 여수·순천 10·19사건은 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해 있던 군부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하며 전남 동부 일부 군을 점거한 사건이다.
전문가들은 ‘박헌영의 지령’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던 김상숙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6일 기자와 통화하며 “대구 10월 항쟁은 일제강점기의 한을 품고 살던 민중이 미군정 시기에도 식량 문제를 겪자 자발적으로 항쟁에 나선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도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으켰다는 증언과 정황이 있다”며 “남로당에 대한 미군정의 계속된 탄압으로 1947년쯤에는 중앙당이 지방 당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 1948년 군 지휘부 25%가 ‘좌익’?
영화에는 “군 내 공산당 세력을 숙청하는 ‘숙군 작업’을 진행한 결과 1948년 당시 군 최고 지휘부 25%가 좌익으로 적발됐다” “병사까지 포함해 약 4750명이 총살, 징역, 파면 등 조치를 당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가 2009년 쓴 ‘국방경비대-육군의 세력 분포와 숙군’ 논문을 보면 여순 사건 이후 당시 병력의 3%가량인 1500여명이 숙청됐다. 논문은 “여순 사건 이후 숙군에는 고문과 자백에 의한 강압적인 방식이 동원됐다”며 “육군은 숙군으로 내부 좌익 세력뿐 아니라 반이승만 중도 세력까지 제거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