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포로’냐 ‘생존자’냐 …한·중 계가법 차이가 부른 논란

2025-02-04

한국기원 운영위원회가 3일 3시간 반에 걸친 격론 끝에 문제의 사석(死石) 관리 규정을 고치기로 했다. “따낸 돌은 바둑통 뚜껑에 담아야 한다. 1회 어기면 2집 벌점, 2회 누적되면 반칙패”라는 이 규정은 지난해 11월 신설되었다가, 이번 LG배에서 ‘결승전 반칙패’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불러왔다. 한국기원이 규정을 고쳐 반칙패를 없앤 것은 그간 벌어진 사태에서 일정 부분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사건의 연원에는 한국과 중국의 서로 다른 계가법이 존재한다. 전쟁을 모방한 바둑은 끝난 뒤 승패를 계산한다. 한국 룰은 〈영토+포로〉를 계산한다. 포로는 따낸 돌(사석)을 말한다. 중국 룰은 〈영토+생존자〉를 계산한다. 생존자란 바둑판 위에 살아있는 돌을 말한다. 포로와 생존자 어느 쪽을 계산하든 승부 결과는 같다. 그러나 이 계가법 차이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진다. 한국은 공배가 무의미하지만, 중국은 공배도 생존자다. 모두 가치를 지닌다. 한국은 포로, 즉 사석이 중요한 재산이지만 중국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국기사들은 대충 아무 데나 놔둔다.

이번 LG배 사건은 바로 사석 관리 때문에 벌어졌다. 지난 1월 하순의 결승전. 1국은 커제 9단 승리. 2국에서 커제가 따낸 돌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가 2집 벌점을 받았고 곧이어 또다시 위반해 반칙패를 당했다. 따낸 돌을 바둑통 뚜껑에 담아야 하고 2회 누적되면 반칙패라는 새 규정에 걸린 것. 엄청난 항의가 이어졌다. 이튿날 최종국에서 커제가 또 사석을 뚜껑이 아닌 테이블에 놔뒀고 심판이 벌점을 부과했다. 격렬한 항의 끝에 커제가 불복하고 대국장을 떠나면서 기권패가 선언됐다. 우승컵과 3억원의 상금은 변상일 9단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을 외면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커제는 “악몽” “지옥” 등의 표현을 동원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고 중국 언론은 달아올랐다. 한·중 바둑팬들의 감정은 격해졌다. 이성적 분석보다는 조롱, 질타가 더 많이 오갔다. 5000년 이어져 온 바둑이 산산조각나는 분위기였다. 이후 중국리그에 외국 선수 참가금지 조치가 발표됐고(지난해 한국기사 12명이 활동했다) LG배 결과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중국기원의 성명이 있었다.

한국기원도 바둑 팬에 사과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녜웨이핑 등 수많은 중국기사와 일본기사까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의견을 냈다. 더 이상의 파장을 막고 바둑을 진흙탕 수렁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 이어졌다.

바둑대회의 하이라이트인 세계대회 결승전이 반칙패라는 파행으로 끝난 것은 팬 서비스 측면에선 최악이었다. 스포츠에서 게임을 몰수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룰은 가혹했다. TV 중계 중에 갑자기 승부가 끝났다. 어색한 승자 변상일 9단의 인터뷰는 이렇다. “이런 룰은 없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사석을 어디에 보관하느냐 하는 문제는) 승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룰은 승부와 관련이 있을 때 생명력을 지닌다. 승부는 바둑판 위에서 해결한다. 이게 바둑의 본질이다. 사석을 뚜껑에 보관하는 건 바둑판 밖의 일이다. 그게 바둑판 위의 승부를 좌우하면 바둑이 허망해진다. 새로운 룰에 대한 계도기간이 전혀 없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한데 여기서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고 룰을 어겨도 되는가.”

전체적으로 한국기원이 서툴렀다. LG배 예선 때는 없던 룰이 결승전에 갑자기 등장한 것, 국제심판의 부재, 언어불통으로 인한 혼란 등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문제의 규정을 없앤 것은 다행이다 싶다. 이것으로 한·중 양국을 얽어맨 불신의 실타래가 풀리기를 희망한다. 농심배 최종 라운드가 오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다. 최종 라운드에 한국 2명, 중국 3명, 일본 1명이 남았다. 농심배가 잘 열릴지 두고 봐야 한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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