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린치핀’(lynchpin)은 핵심축을 뜻한다. 수레바퀴 가운데 축이 빠지면 수레 전체가 전복되는 것처럼 반드시 필요한 핵심이나 구심점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인지 외교적으로는 ‘꼭 함께해야 할 동반자’를 비유할 때 주로 사용된다. 2009년 미국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미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미국과 일본 간의 동맹을 린치핀이라고 불렀다. 그럼 한국은 무엇일까. 영어로 주춧돌을 뜻하는 ‘코너스톤’(cornerstone)이란 표현이 동원됐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떠받치는 주춧돌 역시 수레바퀴의 핵심축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뒤 미 행정부에서 린치핀과 코너스톤의 쓰임새가 바뀌었다. 한·미 동맹을 린치핀, 미·일 동맹을 코너스톤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일본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호사가들 사이에 ‘영어로 린치핀이 더 소중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코너스톤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몇몇 영어 전공자들이 “린치핀이 코너스톤보다 더욱 강한 표현”이란 주장을 펼치자 일본 외교가와 언론이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 중에는 ‘린치핀이 코너스톤보다 낫다’고 여기며 이를 기분좋게 받아들인 사람도 제법 되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이명박정부 시절인 2008∼2011년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2차관과 1차관을 내리 역임한 외교 전문가다.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2021년 3월 신 전 대사가 서울대 총동창회 주최로 열린 조찬 포럼에 참석해 한·일 관계 개선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린치핀과 코너스톤을 서로 비교하려는 오랜 시도를 언급한 뒤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말로 무의미한 논쟁임을 지적했다. 이어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전략의 기본으로 간주한다”고 단언했다. 린치핀을 코너스톤보다 높게 평가하는 일부 한국인의 사고와 달리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훨씬 더 중시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얘기다. 그렇더라도 미국이 한·미 동맹을 린치핀이라고 불러줄 때 한국인 다수가 안도감을 느끼게 됨을 부인할 수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국무총리)과 전화 통화를 했다. 전날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며 윤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데 따른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 권한대행이 재임하는 동안 한·미 동맹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핵심축(린치핀)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 후 미 행정부 안팎에서 한국에 비판적인 발언이 쏟아지며 한·미 동맹 앞날에 대한 우려가 확산한 터라 린치핀이란 단어가 퍽 반갑다. 권한대행을 맡은 지 하루 만에 미국 정상과 통화가 이뤄진 것은 그가 윤석열정부의 국무총리가 되기 전 2009∼2012년 주미대사를 지내며 미국 조야에 쌓은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 권한대행의 어깨가 무거운 만큼 온 국민이 그에게 거는 기대도 크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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