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우리가 사할린으로 간 이유 2

2024-10-30

한인이 끌려간 미의 땅 사할린 섬(일, 가라후토)

제2차 대전이 종결된 이후 79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사할린 한인 문제가 있다. 일본이 사할린을 점령한 기간은 물론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도 사할린 한인에 대한 학대와 차별, 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발생된 것이다.

이런 문제를 유발한 근본 원인은 일본이 러·일전쟁(1904-1905)을 일으켜 1905년 포츠머스 평화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사할린을 북위 50도로 분할을 강요하여 남사할린을 빼앗은 탓이다. 일본은 바로 남사할린을 점령한 후 병합시키고 지명도 일본식 가라후토로 개명했다.

가라후토(樺太)는 사할린 섬을 가리키는 일본식 표현으로, 역사적으로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의해 통치되던 북위 50°선 이남 사할린 지역을 말한다.

사할린 문서에서도 다루고 있듯 '가라후토'라는 지명은 아이누어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왔으며, 화태(樺太)는 한자 훈차 표기로 한국에서는 '화태'라고 읽기도 한다.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근대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할린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전 사할린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에게서 할양받은 남사할린 일대만 통치할 수 있었다. 1907년 4월 1일 일본은 남사할린을 가라후토라는 이름으로 편입해 일본인들을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청사는 도요하라 시(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소재했다.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형성과정

사할린에 한인은 1880년에 이미 마우까 (현 홈스크)에서 여러 명이 미역을 수거하기 위해 연해주 지역으로부터 이주하면서 점차적으로 한인 어민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사할린이 남북으로 분할 되면서 1937년 소련은 북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키면서 북사할린의 한인은 모두 사라졌고 남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만 남게 됐다.

사할린 한인 문제는 바로 남사할린(가라후토)으로 일본이 전쟁 기간에 강제로 동원해 노동을 시킨 한국인을 말하는 것이다.

출신 별로 보면 남한 출신이 95%, 북한 출신이 5%였다. 북한 출신이 적은 것은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 북한에 군수공장을 많이 건설하여 북한에도 노동력 부족 현상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기를 거치면서 중국, 일본, 구소련 등지에 흩어져 있던 해외 한인들의 운명은 해당 국가 및 지역의 정세와 이해에 따라 각기 달라졌다. 그중에도 사할린 지역은 한인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구소련, 일본, 미국 등의 이해가 얽히면서 귀환 자체가 봉쇄 되었던 곳으로, 세계사에 아주 특별한 이주민 사례가 되었다.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형성 과정은 몇 단계를 거친다.

제 1단계인 1870-1905년에 한인들이 사할린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 시기 한인들은 주로 더 나은 생활을 찾아 한반도의 북부 지역 함경도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에 최초로 한인들이 출현한 시기는 1863년이었다. 1869년 사할린 섬은 유배와 유형지로 공포되었지만 최초의 유형자들은 이미 1858년에 있었다.

1890년 사할린에 온 안톤 체홉은 개인적으로 주민 조사를 진행했고 ‘사할린 섬’ 이라는 책에서 “세묘노프의 집에서 만주인들과 고려인들, 러시아인들이 일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최초의 전체 주민 조사에 의하면 28000명의 사할린 주민 중 한인은 67명이였다.

제 2단계(1905-1945년)에 북위 50°를 기준으로 사할린이 두 개로 분리되었다. 이 시기 북사할린에 한인 주민이 형성되었던 것은 대륙(연해주)으로부터 이주와 한국으로부터의 이동(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아무르 유역의 니콜라옙스크, 또는 일본 열도를 경유하여), 그리고 자연 발생적인 증가의 결과였다.

남사할린에 종전 직후에 거주한 한인은 일본이 전쟁 물자 수급을 위해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려고 강제적으로 동원해 보낸 사람들이다. 새로운 땅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인들도, 한국인들도 갔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본 식민자들은 가혹한 군사정치체제의 수립과 경제 팽창을 진행해 국내 또는 국외에 있는 군수 기업들에서 한국인을 노예처럼 부렸다.

그 당시 일본의 경제정책은 주로 토지 몰수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행정 자원을 끌어들였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부동산의 소유자가 지정한 기간 내에 자기 소유의 토지를 신고하고 일본 재정 관청이 그 소유권을 확인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생존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소작인이나 일용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마저 박탈 당한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은 산으로 올라가 개간 농업을 하거나 '타지' 즉 만주, 시베리아,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식민화의 촉진을 위해 일본은 '북진' 정책을 진행했다. 천연자원의 개발은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했다. 한국에서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쓰비시', '미쓰이', '오지' 등의 기업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일 년짜리 계약을 체결하고 다양한 조세감면과 높은 임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예를 들면 1930년까지 '가와카미' (현, 시녜고르스크) 탄광에는 약 500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황제의 칙령 №33에 따라 1907년 4월 일본 정부가 만든 가라후토 총독 체제는 이 영토에서 가능한 최대의 천연자원을 유출하는 조치들을 실행시켰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군사 및 경제적 상황을 극대화 해 노동 자원의 급격한 증대를 필요로 했고 이는 한반도에서 충당했다. 초기 일본 식민권력은 과대한 약속을 하면서 '달콤한 말로' 자원 모집을 하는 형태로 이주를 진행했지만 이것으로는 필요한 인적자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징집의 성격이 강제 이주 형태를 띠게 되면서 동원 양상을 달라졌다. 소위 군수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필요한 노동자 인원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면 1)모집 2)관공서의 취업 알선 3)징용에 의한 동원 등으로 되어 있다.

박득수의 첫 사할린 나들이

전라도 무주에서 살던 박득수는 16살 어린 나이에 누나 박봉순이 살고 있는 사할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일제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대대로 부치던 땅을 빼앗기자 그는 화병을 얻어 졸지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님마저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피폐해진 조선의 농촌은 먹고 살길이 막막하였다. 박득수는 강제 모집에 속아 사할린에 끌려간 누나가 있는 곳에 가면 무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박득수는 혼자 계시는 어머니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본 교장 집에 가사도우미로 맡겨 놓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라후토로 향했다.

ㅡ 어머이! 내 누님한테 갈래! 여기선 할 일이 너무 없어서 못 견디겠어.

왜놈들 때문에 우리 조선 사람들은 죽을 지경이야!

ㅡ 니 아직 어린데 혼자 낯선 데서 어떻게 살라고?

ㅡ 어머이! 가라후토에서 2년만 일하면 돈 많이 벌 수 있대.

또 거기 누님 있잖아. 어머이, 걱정마! 꼭 2년만 갔다 올께!

늦은 가을이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비가 올가 말가 했다. 마치 자연도 박득수의 기분에 동정하는 듯...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기차는 전라북도 무주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 항구는 싸늘했다. 때는 1931년 동짓달 그믐이었다.

먼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은 습기로 말미암아 눅눅해진 얇은 외투를 입은 부산항에 도착한 득수에게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부두에는 몇 백 명의 젊은 남자들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부산항을 출항할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박득수는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항구의 불빛을 바라봤다.

나는 당시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시 한 편을 실어본다.

잘 있거라 나의 조국!

귀여운 삼천리 금수강산!

출렁이는 바다 물결!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버리고

무얼 찾아 이국 땅을 향하리까?

다음날 박득수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동경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탔다. 동경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 집에 가서 구경도 하고 하루 쉬고 다음날 동경을 떠났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후에 급속도로 근대화를 달성한 도쿄의 모습, 즉 카페나 댄스홀, 영화관, 유곽 등 향락적인 거리의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빈곤에 시달리거나 일본 사람에게 멸시당하는 조선 사람들의 비애를 체험한 박득수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북해도의 사할린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동경에서 기차를 타고 아오모리까지 갔다. 겨울 바다는 사할린으로 들어가는 배를 마구 흔들었다. 사할린의 오오도마리(현재 코르사코프) 항구에서 매형이 보낸 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할린은 쌓인 눈과 추위로 박득수를 맞이했다. 누나가 살고 있는 마누이라는 촌은 오찌아이(현, 돌린스크시)에서 한 1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발구(말이 끄는 눈썰매)를 타고 5시간 이상을 매서운 바람이 부는 눈길을 헤치면서 나아갔다.

박득수는 이렇게 많은 눈을 처음 봤다. 참 신기했다. 조선에서는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발구(마소에 메워 물건을 실어 나르는 큰 썰매)에서 내려 눈길을 걷기도 했다.

박득수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사할린에 들어가서 산중에 사는 누나 집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게 됐다. 몇 년 후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누나가 밥은 먹여 주지만 옷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고 하니까 더욱 눌러 앉을 수가 없게 됐다.

박득수는 돌린스크 시내로 내려왔다. 거기서 모집으로 들어온 조선 사람들을 만나 같이 잡일을 하게 됐다. 어른들과 같이 먹고자며 정이 들어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내게 되는데 박득수가 가장 막내였다.

5년 후 박득수는 글도 아는 정직한 청년으로 의형제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됐다. 장가 갈 나이가 되자 가장 맏형이던 고 오지상의 권유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너 여기 있지 말고 한국에 나가 가주고 장개 들라. 여기서는 여자들이 없다 보니께 일본 여자한테 장개 가지 말고 한국 가서 장개 들어 가지고 오라. 우리는 조선에 처도 있고, 자슥도 두고 와서 이렇지마는...... 너는 이렇게 해서 나이 어린 게 안 된다. 고향에 가서 장가 들고 홀로 된 어머니 모시고 살어라"

24살 청년 박득수는 8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집안 어른의 중신으로와 결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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