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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하나 클라크와 세 자녀가 호주 퀸즐랜드주 브리즈번의 한 거리에서 살해됐다. 하나는 오랫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고 법적 보호를 요청했지만 법원은 전남편에게 자녀들에 대한 접근권을 허용했다. 전남편 로완 박스터는 하나의 차량에 불을 지르면서 결국 하나와 아이들은 사망한다. 하나의 사건은 친밀한 관계의 폭력이 단순한 신체적 폭력을 넘어 정서적, 경제적 통제를 포함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전남편은 하나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했고 화가 나면 아이들을 처벌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조종했다. 하나가 집을 떠난 후에도 따라다니며 감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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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사건 이후 ‘강압적 통제’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퀸즐랜드주에서 ‘강압적 통제’를 범죄화하는 내용을 담은 가정폭력처벌 법안이 통과됐다. 강압적 통제에는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심리적·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피해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행위가 포함된다. 올해 5월부터 퀸즐랜드주에서 강압적 통제 행위를 하는 경우 최대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강압적 통제’를 범죄화한 것은 뉴사우스웨일주가 먼저다. 지난해 7월부터 최대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물론 ‘강압적 통제’를 입증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04년 호주 최초로 강압적 통제를 범죄로 규정한 주는 타즈매니아주지만 20년 간 처벌 판결을 받은 경우 10건이 되지 않아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있다. 조혜인 호주 모내시대 ‘젠더와 가정폭력 예방센터’ 책임연구원(한국학과 조교수)은 “호주도 비신체적 폭력을 중요하게 생각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다”면서도 “강압적 통제를 범죄화한 것은 젠더폭력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젠더폭력이 단순히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 개입이 필요한 사회적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는 중요한 행보”라고 말했다.
호주 정부는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국가적 위기’로 명명해왔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정부의 지원과 대응이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조 교수는 “특히 최근 호주 전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관련된 살인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4일에 1명 꼴로 여성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통계가 발표되면서 정부를 향한 거센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앤서니 알바니즈 총리가 “젠더폭력 문제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고 발언한 것도 논란이 됐다. 정부 차원의 노력보다는 사회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호주는 매년 여성폭력을 포괄적으로 다룬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장 내 성적괴롭힘 보고서를 발표하고 젠더폭력 피해자에게 유급휴가를 주는 등 젠더폭력에 대한 대응 방안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호주 연방정부는 지난해 ‘여성 폭력의 예방과 해결’을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 중 하나로 발표하기도 했다. 연방정부는 젠더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2조65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는데, 주요 예산 항목에는 ‘5년간 젠더폭력 관련 프로그램 지원’(925억원), ‘여성부 내 여성 안전 자원 확보 및 활동 지원’(350억원), ‘가정·아동·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심리 치유 현장 지원 활동 사업비 및 긴급 숙소 지원’(53억원) 등이 포함됐다. 호주 상황에 대해 좀더 알아보기 위해 조 교수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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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적 통제’가 범죄가 됐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가.
강압적 통제의 범죄화를 통해 젠더폭력에 대한 법적 정의를 확장하는 의미가 크다. 특히 신체 폭력의 증거가 없어도 정서적 학대나 경제적 착취를 증명할 수 있다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된 점이 큰 변화다.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는 이 정책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예산도 50억원 정도 배정했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 젠더폭력을 예방하고 젠더 불평등 및 가부장적 관습에 도전하며 사회 전반에 걸친 인식 변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한국에선 교제폭력이 ‘강압적 통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통제 행위부터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고 있다. 호주 상황은 어땠나.
호주에서도 비신체적 폭력 행위에 대해 피해자가 증거를 입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2차 피해 혹은 트라우마를 겪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다. 다만, 타즈매니아주에서는 강압적 통제 범죄화 법안이 2005년부터 시행됐지만, 해당 법안의 실효성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법률이 있더라도 집행하는데 한계가 여전히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랫]교제 관계, 모호해서 처벌 불가? 해외에선 ‘이렇게’ 한다
-한국에선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사적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으로 보고 직장 내 규율까지는 고민하지 못하고 있다. 호주에는 10일 유급 휴가가 있다. 이런 제도를 만들어온 맥락이 있을 것 같다.
1984년 호주 정부는 ‘성차별법 1984’를 도입해 직장 내 성희롱을 명확히 금지했다. 2022년 12월에는 ‘적극적 의무’가 도입됐다. 규모에 상관없이 모든 조직과 기업에 직장 내 불법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법적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호주는 상대적으로 젠더평등과 일·생활 균형을 중시하는 사회·정책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또 노동자 보호 정책도 강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의 돌봄·가사노동 부담은 남성에 비해 높은 편이다.
‘10일 유급 가족 및 가정폭력 휴가 제도’가 도입된 것은 젠더폭력 문제가 단순히 사적 문제를 넘어 직장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노동조합과 여성 단체들이 젠더폭력이 단순히 사적인 문제를 넘어 직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꾸준히 강조해왔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직장의 책임과 개입을 요구해온 노력이 법제화의 밑거름이 됐다. 또 호주는 연간 10일의 유급 휴가를 의무화하기 이전에 이미 5일의 무급 휴가가 있었다. 피해자가 젠더 폭력에서 벗어나거나 관련 법적 절차를 준비할 때 직장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조치가 있으려면 무엇보다 정책 전문가와 기업에서 젠더폭력은 개인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이며, 직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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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호주, 가정폭력 피해자에 ‘10일 유급휴가’ 보장하기로
-‘10일 유급 휴가’ 제도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2022년 알바니즈 정부는 젠더폭력의 영향을 받은 직원들에게 최소 10일의 유급 휴가를 제공하는 정책을 내놨다. 중대형 기업은 2023년 2월부터, 소규모 사업체는 그해 8월부터 시행됐다. 이때의 피해에는 강요하거나 통제하려는 행위, 피해나 공포를 야기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가해자의 범위에는 현재나 이전 배우자·파트너, 부모·조부모·손자, 형제·자매, 현재나 이전 배우자·파트너의 가족 등이 포함됐다.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예시에는 주거지 이전 등 안전을 위한 조치, 법원 출석, 경찰 면담 등을 들 수 있다. 이 휴가는 연차, 가족돌봄휴가, 병가 등과는 별도로 사용할 수 있다. 또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증빙을 요청할 수 있고 노동자가 제공하는 모든 정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급여명세서에 해당 휴가 사용 내역이 포함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그럼에도 1년간 사용률이 0.4%밖에 되지 않고 50개 기업 중 휴가 사용 수칙을 공개한 곳도 13개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렇게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
호주 내 모든 기업은 규모에 상관없이 유급 휴가를 제공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지만, 직원들의 유급 휴가 사용률에 대한 데이터를 공개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 그러나 평생 여성 4명 중 1명이 젠더폭력을 경험한다는 통계와 비교했을 때, 유급 휴가 사용률이 0.4%에 불과하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유급 휴가가 있다는 사실,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홍보가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 플린더스대 연구팀에 따르면 피해자의 39%, 고용주의 58%만의 해당 휴가 제도를 알고 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제도에 대한 인식은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은 육아휴직처럼 젠더폭력 피해자를 위한 유급 휴가 정책을 적극 홍보할 필요가 있다. 또 고위 관리직이 적극적으로 이를 홍보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는게 필수적이다.
-한국에선 젠더폭력이 젠더의 위계에 따른 범죄라는 인식이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 호주 상황은 어떤가.
호주의 일부 커뮤니티에서도 젠더폭력을 목격해도 그것이 젠더폭력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빅토리아주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인 개입 훈련’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젠더폭력을 목격했을 때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다. 최근 호주에서도 디지털 성범죄가 큰 문제 중 하나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빅토리아주 ‘성평등 기구’와 같은 기관에서는 ‘소셜미디어 도구모음’과 비디오를 개발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소셜미디어 이용자를 기존의 ‘수동적 주변인(Passive Bystander)’에서 ‘적극적 주변인(Active Bystander)’으로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시행하는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젠더폭력이 사회 문제라는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할까.
가부장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젠더폭력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책임 의식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세계인권선언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두려움으로부터든 자유로울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젠더 불평등이 여성 폭력의 주요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또 여전히 젠더 기반 폭력으로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호주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로서, 한국이나 호주에서 일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만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주를 선진 사례로 언급한다. 그러나 호주가 한국으로부터 배울 점도 많다. 다만, 정부나 기업의 리더십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법안을 시행하거나 적극적인 캠페인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국에 전하고 싶다. 또 법안이 시행되더라도 그 실효성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 임아영 젠더데스크 겸 플랫팀장 layknt@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