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주요 대기업이 앞다퉈 제약·바이오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기존 기업을 인수하거나 바이오 계열사를 신설하는 등 대규모 투자에 나서며 그룹 미래를 책임질 신사업으로 집중 육성하는 모양새다.
1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대기업·중견기업 그룹이 제약바이오 산업 공략을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 중이다. 한때 '대기업의 무덤'이라는 말까지 나오며 외면받던 헬스케어·제약바이오 산업에 다시금 관심이 쏠리고 있다.
롯데그룹은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MDO) 자회사인 롯데바이오로직스에 유상증자와 채무보증을 무릅쓰며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롯데그룹은 2022년 5월 자본금 130억원을 투자해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한 이후 네 차례 유상증자를 진행했다. 올해 3월 결정한 2100억원 규모 유증 포함 총 7832억원을 지원했다. 지난해 롯데그룹에 유동성 위기설이 도는 와중에도 롯데바이오로직스의 송도 1공장 건설을 위한 자금 약 9000억원 규모 대출에 대해 자금보충약정을 체결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롯데바이오로직스 설립 당시 약 2000억원에 인수한 미국 시러큐스 BMS 공장을 통해 매출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공장 인수 당시 넘겨받은 수주 물량에 힘입어 매년 2000억원대 매출액을 기록했다. 시러큐스 공장은 바이오의약품 전용 생산시설로 생산규모는 연간 3만5000리터 수준이다. 2023년부터 약 1억달러(약 원)를 투자해 ADC생산 시설을 증설했다.
사업 출범 후 한동안 기존 수주 물량에만 의지해 핵심 과제로 신규 CDMO 수주 계약을 따내는 것이 꼽혔으나, 지난달 아시아 소재 바이오 기업과 ADC 임상시험용 후보 물질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하며 물꼬가 트였다는 평가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말 삼성바이오로직스 부사장 출신인 제임스 박 대표를 새로 영입하며 리더십 교체에 나서기도 했다. 제임스 박 대표는 올해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2027년부터 송도 바이오 캠퍼스 1공장의 상업 생산 가동 계획 등을 밝혔다. 당시 연내 첫 수주 계약을 맺을 것이라며 속도전을 예고했는데,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상반기에 신규 수주를 성사하며 약속을 지켰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2030년까지 글로벌 톱10 CDMO 기업 도약을 목표로 삼았다. 2027년 송도 공장 가동 후 풀 가동까지 3~5년이 걸릴 거라는 전망이다.
LG그룹은 미래먹거리로 바이오 사업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 3월 LG 주주총회에서 인공지능(AI)과 바이오를 미래 성장을 이끌어갈 핵심 육성 사업으로 꼽았다. 지난 2월 백민경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와 '차세대 단백질 구조 예측 AI' 개발을 위한 공동 연구 계약을 체결하는 등 AI와 바이오 사업 연계 가능성도 드러냈다.
특히 신약 개발 주축인 LG화학을 중심으로 글로벌 신약 공급 파이프라인 확보에 나선 상태다. LG화학은 지난해 'LG화학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를 통해 신성장 3대 동력 중 하나로 '혁신 신약 개발'을 꼽았는데, 3대 사업 비중을 2030년까지 50% 이상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바이오 중심 신약 개발은 생명과학사업본부가 담당한다. 지난 2022년 항암제 개발 전문 기업인 미국의 아베오 파마슈티컬스를 인수하는 등 꾸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CJ그룹은 지난해 12월 바이오신약 개발 계열사 CJ바이오사이언스에 400억원(395만 2960주) 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CJ제일제당이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의약품 사업에 투입한 금액은 4059억원이다.
2021년 CJ제일제당이 인수한 CJ바이오사이언스(옛 천랩)는 마이크로바이옴(인체내 미생물 총칭) 기반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CJ 그룹에 편입된 이후 한 차례도 흑자를 내지 못했지만, 주력 파이프라인 'CJRB-101'의 임상 및 후속 파이프라인 개발 가속화를 위한 선제적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CJ 그룹은 지난해 레드바이오(의료·제약) 사업인 CJ바이오사이언스를 주력으로 밀기 위해 그린바이오(농업·식품) 사업인 CJ제일제당 바이오사업부 매각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최근 유력 인수자였던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 사태'에 휘말리며 매각설을 부인하는 등 매각이 무산되기는 했으나, 업계에서는 재무구조 개선 후 몸값을 키워 재매각에 나설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CJ바이오사이언스와 마찬가지로 2021년 인수한 세포·유전자치료제(CGT) CDMO 기업인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바이오사이언스는 오는 6월 네덜란드 라이덴의 1만2000㎡ 규모 GMP 제조시설이 완공될 예정으로 연간 최대 2억 개의 완제 의약품 생산이 가능해진다. 지난해 순손실 186억원을 기록하며 최근 998억원 규모 손상차손(재무상 손실)을 반영했지만, 업황이 개선되고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다시 실적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HD현대, 삼양라운드스퀘어, 오리온 등 조선·식품 중심 전통 제조업 기업도 지난해 바이오 사업 진출 대열에 합류했다.
지난해 11월 HD현대의 조선 계열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AMC사이언스에 자본금 270억원을 출자해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AMC사이언스는 지잔 2023년 서울아산병원의 사내벤처로 출범한 신약개발사로 의학·약학 연구개발업을 주사업으로 영위하고 있다. 자회사 편입 후 HD한국조선해양이 지분 100%를 보유하게 된다.
HD현대는 지난 2020년 바이오, AI, 수소 사업을 중심으로 한 미래위원회를 출범시키며 바이오 산업 진출을 본격화했다. 아산재단, 카카오와 함께 의료데이터 기업 아산카카오메디컬데이터를 설립했고, 2021년 메디플러스솔루션을 인수했다. 같은 해 투자 자회사 HD현대미래파트너스를 통해 암크바이오를 설립했는데, 서울아산병원 영문 이름(AMC)을 딴 회사로 바이오신약 개발을 사업 목적으로 삼았다. AMC사이언스는 암크바이오가 개발 중인 후보물질을 이어받아 신약 개발을 이끌 예정이다. 대형병원인 아산병원의 임상연구 역량과 긍정적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예측이다.
삼양라운드스퀘어는 지난해 초 연구소 삼양스퀘어랩에 노화방지·디지털헬스 관련 조직을 신설했다. 노화연구센터는 노화 관련 연구개발(R&D) 기획과 파이프라인 개발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는다. 같은 해 9월 비전 선포식에서 미래 신사업 중 하나로 마이크로바이옴 등 바이오 사업을 꼽았는데, 신사업 확장 방안 중 하나로 바이오·헬스케어 기업 인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양식품은 지난해 12월 마이크로바이옴 기업 헬스바이옴이 개발한 근력 개선 건강기능식품 소재 'HB05P'를 함유한 제품의 국내 독점 판권 계약을 체결해 올해 하반기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마이크로바이옴 신약개발사와 근감소증 관련 공동연구 계약 체결도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사인 오리온은 지난해 5485억원을 투자해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 최대 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앞서 오리온은 수젠텍, 지노믹트리, 큐라티스 등 진단기업과 바이오벤처 투자를 통해 바이오 시장에 진출한 바 있다. 2022년에는 치과질환 치료제 개발 기업 하이센스바이오와 합작법인 오리온 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해 오리온그룹 지주 회사 산하에 두었다.
오리온은 지난해 리가켐바이오 지분취득에 따른 파생상품 평가이익 등 비경상손익 1437억원이 영업외수익에 반영되며 당기순이익이 급증했다. 리가켐이 지난해 오노약품공업에 ADC 후보물질 'LCB97'을 7억달러(9435억원) 이상 규모로 기술수출 하는 등 기술력을 재확인하며 성공적인 투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기존 제약바이오 기업을 인수하거나 지분 투자하는 방식은 바이오 사업에 뒤늦게 뛰어든 기업 사이에서 매력적인 선택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OCI가 지난 2022년 부광약품을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OCI홀딩스는 부광약품 지분 11.32%를 1461억 원에 인수해 최대 주주에 올랐고, 무산되긴 했지만 지난해 한미약품 인수를 추진하는 등 제약바이오 사업 확장 의지를 드러냈다. 부광약품의 덴마크 자회사 콘테라파마가 지난해 주요 파이프라인 임상에서 실패하며 위기를 맞았지만, 지난달 약 1000억원 규모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진행해 공장을 인수하고 합성의약품 CDMO에 뛰어들겠다고 밝히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
한화그룹은 한화임팩트를 중심으로 바이오 투자 포트폴리오 구축에 나섰다. 최근 3년간 바이오 분야 투자 금액만 약 2000억원 이상이다. 2021년 5월 정관을 변경해 '의약·생명과학 및 바이오 관련 사업'을 추가했고, 2021년부터 2022년까지 유전자 편집 기술 스타트업인 미국 이나리 애그리컬쳐에 약 1515억원을 투자했다. 지난해엔 약 1372억원(1억300만달러) 규모 이나리 신규 펀딩 라운드에도 참여했다. 해당 건의 정확한 투자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외 2022년 미국 유전자치료제 기업 테쎄라 테라퓨틱스(투자규모 비공개), 2023년 바이오사이언스(262억원), 엔소마(263억원), 써지컬테라퓨틱스(160억원) 등 투자를 이어갔다.
대상도 꾸준히 국내외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사업보고서 기준 대상그룹은 대상과 대상홀딩스를 통해 ▲BG Pharmaceutical, Inc.(2024년 12월, 1000만원) ▲앰틱스바이오(2023년 12월, 30억원) ▲대상셀진(2021년 7월, 25억원) ▲엑셀세라퓨틱스(2021년 5월, 20억원) ▲바이오코즈(2019년 3월, 약 10억원)에 투자했다. 이중 항진균제 신약 개발 기업 앰틱스바이오와는 2023년 말 총 75억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또 대상셀진은 대상그룹 사내벤처 기업이었던 곳으로, 지난 2021년 25억원을 투자해 자회사로 편입했다. 미세조류인 클로렐라를 유전자 재조합 하는 독자 기술을 통해 화장품, 의료용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재조합 단백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생명 공학 기술을 활용해 의약품·화장품과 바이오 시밀러 등을 연구·제조하는 것이 목적이다. 현재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CJ·한화그룹은 과거 제약바이오 분야 진출에 실패한 전력이 있다. 롯데는 지난 2002년 건강기능식품 업체 아이와이피엔에프를 인수해 롯데제약을 출범했지만, 의약품은 하나도 생산·판매하지 않다가 2011년 롯데제과로 흡수합병되면서 시장에서 철수했다.
CJ는 1984년 유풍제약과 2006년 한일약품을 인수하며 제약산업에 진출했다. 2014년 CJ제일제당이 제약사업부문을 CJ헬스케어라는 독립법인으로 물적분할하며 제약사업 확대를 목표로 삼았지만, 2018년 CJ헬스케어를 한국콜마에 1조3100억원 규모로 매각하며 의약품 사업에서 철수했다. CJ헬스케어는 2020년 HK이노엔으로 사명을 바꿨고,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케이캡'을 앞세워 올해 첫 연매출 1조원 돌파를 노리는 등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한화는 한화케미칼(현 한화솔루션)을 중심으로 1996년 의약사업부를 신설하고 2004년 에이치팜을 흡수합병하면서 자회사 드림파마를 출범시켰지만, 바이오시밀러 개발 실패로 2014년 알보젠에 드림파마를 매각했다.
이들 대기업이 한번 쓴맛을 보고도 다시 제약바이오 산업에 진출하려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먼저 국내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며 고부가가치 산업인 제약바이오 분야가 주목받는 것이란 분석이 있다. 또 제약바이오 산업에 진출한 삼성, SK 등이 잇따라 성과를 내며 바이오산업에 안착한 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성바이오로직스 설립 이후 삼성그룹은 11차례 유상증자를 통해 총 1조1784억원을 투자하며 공격적 행보를 보였다. 삼성바이오는 바이오의약품 CDMO 시장에 안착하며 지난해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 중 최초로 매출 4조원을 돌파했고, 이를 다시 설비 투자에 활용하며 '초격차'를 추구하고 있다.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를 통한 바이오시밀러와 신약 개발 사업도 순항 중이다.
SK그룹은 SK바이오팜이 자체 개발한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가 글로벌 매출 1조원 초읽기에 들어가며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 세노바메이트를 SK그룹의 위탁생산(CMO) 기업 SK팜테코가 생산하는 등 의약품 전주기 밸류체인을 구축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한국바이오협회는 올해 초 '2025 바이오산업 전망 K바이오 핫이슈' 리포트를 통해 바이오산업 4대 핵심 키워드로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통상 변화 ▲ADC·CGT 등 새로운 모달리티 급격 성장 전망 ▲바이오의약품 중심의 시장 확대, CDMO 성장 기회 ▲국내 대기업 바이오 투자 가속화 등을 꼽았다.
이중 국내 대기업 바이오 투자 가속화 트렌드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HD현대, 아산병원 역량 활용해 신약 개발 분야 진출 (AMC사이언스 설립) ▲LG그룹, 미래먹거리로 바이오 사업 확대 계획. LG화학 중심으로 글로벌 신약 공급 파이프라인 확보 ▲CJ·롯데 등 신약 개발·CDMO 적극 투자를 언급했다.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본격적인 실적 성장 단계에 도달하며 대기업의 관련 기업 투자·인수도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권해순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2023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성장 사이클에 진입한 국내 바이오제약 산업은 2024년 기대감을 반영한 초기 성장 단계(시즌 1)을 거쳐 2025년부터는 수익 창출이 가시화되는 실적 성장 단계(시즌 2)에 돌입할 전망"이라면서 "산업 전반의 성장세가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