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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된 원숭이들이 서빙해 이름을 알린 일본 후쿠시마 주변의 한 식당. 프랑스 미술가 피에르 위그(63)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사람들이 떠난 이 식당을 찾아간다. 원숭이 한 마리가 남아 인간이 가르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작가는 일본 전통 공연 노(能) 가면을 씌워 더욱 기괴하고 애잔한 영장류를 영상에 담았다. '휴먼 마스크'(2014)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지, 그마저도 혹시 가면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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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대미술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 피에르 위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리미널(Liminal)’이 27일부터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베니스의 피노컬렉션 미술관과 공동 기획한 신작을 비롯해 최근 10여년 간의 주요작 12점이 나왔다. 25일 프리뷰에서 김성원 부관장은 "2023년부터 제작에 참여한 결과, 세계적 작가 위그의 전시를 열게 됐다“며 "‘어렵다’ ‘무섭다’라고도 하지만 인간과 비인간, 인간 이후와 인간 바깥의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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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리미널’에 대해 작가는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현실과 허구,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에 경계가 흐릿한 ‘리미널’의 세계를 전시로 시각화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조각으로 만들까, 불가능한 것, 있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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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 블랙박스의 어둠 속 첫 작품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작은 조각 ‘에스텔라리움’이다. 만삭 임산부의 배를 캐스팅했다. 태어나기 전 인간, 존재의 과도기적 상태를 상징한다. 제목과 동명의 신작 ‘리미널’은 폐허 속에서 홀로 몸부림치는 인간 형상이다. 얼굴은 시커멓게 텅 비어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형상은 외부 데이터를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 간다. 이것은 멸종된 인간의 데이터만 남은 세상의 끝일까 혹은 생명의 시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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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브란쿠시(1876~1957)의 대표작 ‘잠자는 뮤즈’의 작은 복제판을 집처럼 인 소라게가 천천히 기어 다니는 수족관 ‘주드람4’(2011),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가 나직이 울리는 가운데 간헐적으로 인간의 체취를 뿜어내는 ‘오프스프링’(후손ㆍ2018) 등 공감각적 SF영화와도 같은 전시다. 이어지는 서사는 없지만, 수족관의 물소리나 불길한 음악이 낮게 깔린 전시장이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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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속 생물체나 배양기 속 암세포의 분열과 증식에 따라 편집되는 영상 등 전시작들은 예측 불허 그 자체다. 조건은 정해져 있되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를 보여준다. 암세포는 의료 기관에서 연구용으로 배양하는 헬라 세포가 들어 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매주 헬라 세포를 공급한다. 마지막 영상 ’카마타‘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발견된 백골을 두고 기계가 장례를 치르듯 의식을 수행하는 장면이다. 전시장 내 센서가 수집한 온ㆍ습도, 사람들의 움직임 등을 기반으로 실시간 편집되면서 끝없는 장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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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상의 이유로 프리뷰에 나오지 못한 위그는 ”내 작업은 인간 존재론에 대한 보편적 질문에 기반을 둔다.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서 다시 타고 올라가는 리움미술관의 전시 공간에서 순환성이나 유기적 관계를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7월 6일까지. 성인 1만 6000원.
9년 만에 공개된 로댕 '칼레의 시민', 로스코 옆 장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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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M2와 로비에서는 현대미술 소장품전도 열린다. 2022년 재개관 상설전 이후 3년 만이다.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과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III’ 등 리움미술관의 대표 소장품도 전시됐다. ‘칼레의 시민’은 14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 점령당한 프랑스 항구 도시 칼레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 시민 영웅 6인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 총 12점인 오리지널 에디션 중 마지막 작품이다.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성미술관 플라토(옛 로댕갤러리)에 17년 동안 상설 전시됐다가 2016년 플라토 폐관 후 9년 만에 수장고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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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이 1964년 그린 검은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1968년 작 노란색 추상화와 나란히 걸렸다. 이우환ㆍ김종영의 작품들이 별도의 방에 각각 전시되는 등 한국 미술 소장품도 돋보인다. 조각 중심으로 최근 새로 수집한 작품들까지 총 35명의 44점이 나왔다. 현대미술 소장품전은 1년 이상 이어질 예정이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과의 통합권 성인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