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타이핑을 한 서류 같은 게 들어있었다. 투서였다. 투서를 쓰게 된 친구를 이미 P기자의 귀띔으로 알게 되었다.
‘울산문화방송 보도부장 최종두/ 위 자는 울산시 다운동(그린벨트) 지역에 도자기 공장을 세워 주택을 짓고 도자기를 구워서 전시회를 열고 보도기관의 지위를 이용하여 강제로 팔고 있는 자임’이라고 적고 P기자는 로얄 레코드를 타면서 기사까지 두고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술값을 내지 않는 자이며 행패를 부리는 자로 적어 놓았다. 이 밖에도 몇몇 신문기자의 터무니없는 비위 사실을 날조해 적어두었다. 투서자는 모 내과의원의 원장 명의로 돼 있었다. 물론 투서자의 이름은 도용한 것이었다.
P기자는 이 투서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말했다. 중앙일간지 지국장을 하는 이모란 자가 있었다. P기자를 따르며 가까이하면서 수석 모임으로 열두 명이 모여 12인 애석회(愛石會)란 서클을 만들고 거의 매일 어울리게 되었다. 그는 김해 출신으로 울산에 와서 토대를 잡고 살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자였다. 그러던 중 동향인이 경찰서장이 부임해 옴으로써 서장실을 들락거리며 신문지국장의 본분을 이탈해 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럴 때 찬스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가 포착한 찬스는 사리채취업의 업자에게 붙어 돈을 모을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는 건축 붐이 일면서 모래값이 금값으로 둔갑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 사리채취업을 하는 데는 제법 많은 사업자금이 필요했다. 그는 그 많은 자금을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다. 각종 부담금과 시(市)로부터 허가를 받으면서 내야 할 공탁금도 가벼운 돈이 아니었다. 행정당국에서도 사리채취업에서만은 특별히 합당한 허가 규정이 아니고는 섣불리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울산시는 허가기관이었지만 경남도의 승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만큼 힘이 드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 채취장의 규모가 크고 또 양질의 모래일 경우는 더 엄중한 규정을 붙여 허가를 해주지 않던 당국이었다.
그런데 전국의 사리업자가 모여들어 군침을 흘리는 장소가 있었다. 울산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태화강의 하류 쪽에 대도란 섬이 바로 그곳이었다. 대도는 순 모래무지로 이루어진 섬으로 강폭 가운데 자연적으로 생겨난 섬이었기 때문에 불도저로 밀어 모아 포크레인으로 들어내기만 하면 노다지가 쏟아지는 금싸라기 모래섬이었다. 이 섬의 채취 허가를 따내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도 시(市)가 꿈쩍할 리 없었다.
힘센 기관이나 소위 빽이란 빽은 다 동원해도 가망이 없게 되자 어느 약삭빠른 업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울산시가 공업센터가 되고부터 사흘토록 개최하는 대중 행사를 치러야 할 실내 행사장이 없어 고충을 당하면서도 당장 그런 건물을 마련할 여력이 시(市)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방면에 도사급에 해당될 만한 인물이었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건 울산에 산재해 있는 언론사의 기자들이었다. 그 업자는 외지의 업자여서 지역 사정을 잘 아는, 다시 말해서 무슨 사고가 났을 때 모든 기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이모 지국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모 국장은 일체의 보도 기자들과 생기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커버해 주는 대신 현장에 투입되는 장비에 대해서는 자신이 투입하는 장비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약정서를 꾸미게 되었다. 불도저와 포크레인, 운송 차량이었다.
그런 다음 그 외지의 업자는 울산의 업자 가운데 발이 넓은 사람과 함께 채취 허가를 받아내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울산MBC의 정 사장과 두텁게 친분이 있는 K씨가 그 사업에 끼이게 되었다. 외지의 그 업자는 울산의 업자 K씨를 앞세우고 울산의 토호 중에서 땅과 농지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이모 노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옹은 재산은 많아도 자손이 귀한 처지여서 양자와 양녀를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자와 양녀를 조금만 아는 사이인 젊은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면 금방 얼굴색이 밝아지는 노인이었다. 또 이옹은 열심히 노력하는 젊은이를 만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주려고 하는 인정 많은 어르신이었다.
대문을 들어서서 대청마루에 오른 사리업자 K씨가 엎드려 큰절을 하고는 말했다. “아버지! 울산의 온 시민들에게 좋은 일 하나 할 게 있어 왔습니다!” “좋은 일이라니…?” “예! 아버지 이름으로 울산시민 모두에게 칭찬 듣는 일이고 시청 역시 박수를 치게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보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허 참! 요즘 세상에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어데 있는데… 그래 차근차근 내용을 설명해야 내가 결정을 할 게 아이가. 김 군, 니가 하는 일이라면 천상 내가 도와줘야지, 어짜겠노!” “예, 이 일을 하는 데는 아버지 돈은 한 푼도 안 들고 대신 돈 5억을 여기 이 친구하고 내가 부담해서 큰 건물 하나 지어서 시청에다 기부할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돈을 충당하는 데 사용할 모래밭은 하나 파내려고 허가 신청을 하는데 그 서류를 아버지 명의를 빌려서 하면 시청이 허가를 해줄 것 같아서…” “허 참. 김 군, 니가 간이 크기로 보통이 아니구나. 돈 5억이 어디 작은 돈이가?” “맞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기부하는 거 같이 하는 겁니다. 여기 누가 돈 5억 선뜻 내놓고 좋은 일 할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버지 말고 말입니다.”
이옹은 K씨의 그럴듯한 말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고 김 군 니 얼굴 보고 내가 해주지만 이거 도장 찍어주면 니가 좀 돈 벌어들이는 일이 있겠나 말이다.” “예! 아버지! 항상 걱정해주시는 은혜 이번 일 마치고 나면 단단히 갚아야지요.” “야 이 사람아. 내 걱정이랑 말고 어서 돈 벌어서 너거 식구 걱정 없도록 하기나 해라.” “예! 아버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다시 큰절을 한 다음 물러 나왔고 시청에 접수한 허가 서류는 HR의 대리인인 정택락 사장이 지사에게 전화를 했으니 도청이 거절할 리 없었다. 그러나 경남도는 울산시청에 지시하기를 경남도청은 모르는 일로 할 테니까 시가 지역사회 형편상 꼭 필요한 실내체육관을 지었다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경상남도는 뒷날의 책임을 울산시에다 몽땅 넘겨놓고 보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결국 허가를 얻게 되었다. 그런 다음 울산에는 이옹의 이름을 붙인 최초의 실내체육관이 생겨나게 되었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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