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굳이 전기차가 아니더라도 자동차는 움직이는 컴퓨터 같은 느낌이다. 자동차의 계기판 외에도, 트립(trip) 컴퓨터 디스플레이는 누적 주행거리나 연비, 평균속도 등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며칠 전 출근길의 트립 리포트는 집에서 병원까지의 이동거리는 물론이고, 운행에 사용된 에너지와 남아있는 에너지, 앞으로 더 달릴 수 있는 거리도 알려주고, 심지어 남동풍이 불어준 탓에 에너지를 얼마나 아꼈는지도 깨알같이 자랑하고 있었다. 오호라 남동풍, 공명을 도운 고마운 바람이 내게도 불어주었구나 즐거워하려다 보니, 조금 어색했다. 적벽에 불었던 바람은 남동풍이 아니라 동남풍이었던가.
남동(南東, SE)쪽은 남쪽과 동쪽의 사이의 방위(方位)이다. 남편과 동편 중에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굳이 세분하자면 북쪽을 0°로 기준하여 시계 방향으로 112.5°각에 위치한 동남동(ESE)향에서 157.5°각의 남남동(SSE)향까지도 나눌 수 있지만, 통상 135°돌아간 방향각을 의미한다. 그러면 동남(東南)쪽은 어느 방향인가. 실은 동남쪽과 남동쪽은 같은 방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동남풍 또는 남동풍이라는 표현은 모두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부는 바람을 의미하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두 표현을 동의어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남풍과 남동풍으로 달리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동양은 전통적으로 방위를 표현함에 있어 동남풍이나 서북지역과 같이 동서방향을 먼저 말한다. 이와 달리 영어권 전통에서는 노스웨스트 항공, 사우스이스트 파크와 같이 남북(북남)을 먼저 말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도 본래 동서를 앞에 두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서양식의 학술용어나 문화가 유입되다 보니, 점차 남북을 앞세우는 서양식 표현이 우리말에 스며든 것이라고 한다.
방위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가 또 있다. 분자생물학에 쓰이는 웨스턴 블롯(western blot)이라는 실험법이 있다. 웨스턴은 말 그대로 서쪽이라는 뜻이고 블롯은 얼룩 또는 얼룩이나 물방울 등을 찍어낸다는 뜻이 있다. 서쪽 찍기라고 해석되는 이름은 난해하기 짝이 없지만, 연구 현장에서는 밥 먹듯이 자주 하는 실험이다. 준비된 시료를 폴리아크릴아마이드 젤에 넣고 전기장을 걸어주면 단백질 분자들이 전하량 또는 분자량에 따라 다공성 젤 내부에서 각기 다르게 이동하는 원리를 이용해 공간적인 분리를 유도할 수 있는데 이를 전기영동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젤 상에서 단백질이 분리된 형상을 나이트로셀룰로스 막으로 찍어 옮기고, 목적하는 특정 단백질을 항원으로 인식해 결합하는 1차 항체와 그 1차 항체를 인식하는 2차 항체를 순서대로 붙임으로서 특정 단백질을 선별적으로 검출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실험법을 어쩌다 웨스턴 블롯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까. 처음에는 뜬금없지만 유래를 알게 되면 상당히 유쾌하다. 최초에는 다공성 젤을 이용한 전기영동법과 나이트로셀룰로스 막으로의 전사(轉寫, transfer)를 활용하여 DNA의 분리 검출을 성공하였는데, 이 실험을 고안한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서던(Sir E.M. Southern Ph.D)의 이름을 따서 서던 블롯이라 부르게 되었다. 분자생물학의 약진과 더불어 이 실험법은 널리 쓰이게 되었고, DNA 뿐만이 아니라 RNA와 단백질을 분리 검출하는 데에도 응용되기 시작하였다. 학자들은 DNA 검출법이 남쪽을 뜻하는 서던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에 착안하여, RNA 검출법은 노던(northern) 블롯, 단백질 실험법은 웨스턴 블롯, 단백질의 번역 후 변형을 확인하는 방법은 이스턴(eastern) 블롯, RNA와 단백질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방법은 노스웨스턴(northwestern) 블롯이라 부르는 식으로 차례차례 방위를 나타내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기실은 실험이 개발될 때마다 남아있는 방위를 하나씩 적용했을 뿐이므로, 왜 단백질은 서쪽이고 RNA는 북쪽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도리가 없다. 또한 남쪽은 붉은색이고 동쪽은 푸른색이라는 식의 우리 전통의 오방색 개념을 대입한들 알아내기 힘들 것이다. 이렇듯 일견 누구나 알 수 있을 것 같은 간단한 방위 개념조차도 맥락이나 배경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하물며 더 복잡한 사안은 어떻겠는가.
바야흐로 2026년 새해가 밝았다. 본래 우리식의 음력으로 따지자면 설이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그레고리력이 도입된 것이 을미개혁 때이므로 공식적으로 양력 새해를 기준하기 시작한 내력이 벌써 130년도 넘었다. 이런 배경에서 원래 우리는 음력을 쓰던 민족이므로 설이 지나기까지는 새해가 되었다고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이가 있다면, 공식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앞으로도 사회적인 합의를 무시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리라 생각한다.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 우리 회의 대표 자리를 놓고 새해에도 한동안 뜨거워질 터이다. 그러나 현명하신 우리 회원들께서, 맥락과 합의를 무시하는 억지쟁이와 고소쟁이, 그리고 회원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존재하는 협회를 지향점이 아닌 개인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이들만 걸러주시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회원들의 순풍만범을 위해 부디 새해에는 우리 협회에 동남풍이 불어와주기를 고대한다. 당연히 남동풍이어도 괜찮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씨] 전국 곳곳 '눈·비'…수도권 '미세먼지'](https://www.jeonmae.co.kr/news/photo/202512/1216199_931577_524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