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정당 득세에 ‘넷제로’ 위한 EU의 그린 딜은 속도 조정 중

2025-08-12

‘라포르퇴르(rapporteur).’

위원회 중심으로 운영되는 유럽의회에서 법안이나 안건 보고를 작성하는 의원을 일컫는 프랑스어다. 지난달 초 유럽의회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입법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은 라포르퇴르가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극우 정당의 의원에게 돌아간 것이다.

행정부 역할을 하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40년까지 온실가스를 1990년 기준으로 90% 줄이겠다는 법안을 제안했다. 이에 관련된 여러 법안을 입법기구인 유럽의회와 27개 회원국 장관의 모임인 각료이사회가 논의해 최종 법을 만든다.

그런데 극우 정당 의원이 라포르퇴르를 맡게 되며 일부에서는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그린 딜’이 좌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EU의 정체성과도 같은 그린 딜은 속도가 조절될 수는 있어도 멈춰 설 수는 없다.

극우파, 그린 딜 입법 핵심 맡아

EU의 탄소 중립 달성에 빨간불

유권자도 환경보다 성장 강조

EU 유권자가 5년마다 직선으로 선출하는 유럽의회는 초국가적 민주주의 실험장이다. 각 회원국에서 선출한 의원들이 국적이 아니라 정당 이념에 따라 유럽의회에서 정치그룹(원내교섭단체)을 구성해 활동한다. 중도 우파는 유럽인민당(European People’s Party·EPP), 중도 좌파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진보연합(S&D·이하 사민그룹) 정치그룹에 속한다.

지난해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후 변화를 부정하고 반이민과 반이슬람을 앞세운 극우정당들이 전체 의석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2019년 선거에서는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하려는 녹색당과 중도 정당이 세력을 확대했으나 지난해 선거에서는 극우정당의 세력이 급증했다.

EU 신성장 전략 ‘그린 딜’ 좌초 위기

그럼에도 이번에 라포르퇴르가 유럽을 위한 애국자(Patriots for Europe·PfE) 정치그룹에 넘어간 것은 EPP의 묵인과 방조 때문이다. 중도 우파 유럽인민당 그룹은 720석 중 188석을 보유한 최대 교섭단체다. 보통 라포르퇴르는 EPP나 사민, 아니면 녹색그룹이 번갈아 맡아왔다.

그런데 지난달 초 이 직책 선출 과정에서 최대 그룹 EPP가 불참해 애국자그룹에 어부지리를 안겨 줬다. 이 그룹에는 극우정당 프랑스의 국민연합(RN)과 이탈리아의 동맹 등이 참여한다. 국민연합의 당수 조르당 바르델라는 올 초부터 “우리는 경제 성장률 하락에 반대한다”며 그린 딜 유예를 요구해왔다.

사민과 중도 및 녹색 그룹은 유럽인민당이 그간의 비공식적 연정을 파괴했다고 맹비난했다. 큰 틀에서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EPP와 사민, 중도 및 녹색그룹은 그린 딜과 같이 ‘유럽’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법안을 서로 조율하면서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 EPP가 이런 불문율을 깨버렸다. 가령 지난해 여름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유럽인민당은 농부의 편을 들며 그린 딜에서 요구하는 독성 살충제 사용 금지의 완화 등을 요구했다. 그런데 선거에서 승리한 후 EPP는 그린 딜 이행에서 일부 후퇴하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라포르퇴르는 그린 딜에 관한 유럽의회의 입장을 조율해 집행위원회 및 각료이사회와의 협상을 주도한다. 그만큼 그린 딜 입법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반면에 사민과 녹색 그룹은 애국자 그룹의 라포르퇴르를 철저하게 감시해 레드라인을 벗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2019년 12월 첫 임기를 시작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경제 성장 속에서도 환경 보호가 가능하다며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그린 딜을 제시했다. 2050년까지 유럽을 온실가스 중립(넷제로) 대륙으로 만들겠다며 이후 다양한 법을 제정했다. 5년의 첫 임기 동안 3분의 2 정도의 그린 딜 입법 목표를 달성했다는 게 집행위의 자체 평가다.

EU로 수입되는 철강과 시멘트, 알루미늄 등이 탄소 순배출로 만들어졌다면 추가로 관세를 부과하는 탄소국경세가 2023년부터 시범 도입됐고 내년부터 정식 시행된다.

기업이 환경·사회·거버넌스(ESG)와 다양성 등을 공개하는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도 올 초부터 시행됐다. 근로자 250명 이상과 연 매출액 4000만 유로(약 640억원) 이상의 상장·비상장 기업이 이를 준수해야 한다. EU에 상장했거나 투자한 국내 기업도 따라야 한다.

지난해 12월 집권 2기를 시작한 폰데어라이엔은 지난 2월 초 유럽의 경쟁력 강화와 규제 완화를 우선순위로 제시했다. 탄소국경세와 기업 지침 적용의 일부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기업 지침의 경우 보고 대상 기업을 80% 정도 줄이려 한다. 폰데어라이엔은 경쟁력 강화 및 규제 완화가 기후위기 달성과 상충하지 않게 조정한다고 밝혔다. 경쟁력 강화 및 규제 완화가 그린 딜 포기가 아님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그린 딜 포기, EU 국제 위상 훼손할 수도

그렇지만 유권자가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하는 만큼 저성장 시대에 기후위기 대응은 쉽지 않다. EU 시민을 대상으로 분기별로 시행하는 설문조사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에 따르면 환경과 기후 변화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본다는 대답이 2019년에 비해 올해는 10%포인트 넘게 하락했다. 반면 높은 물가로 인한 팍팍한 살림살이를 꼽은 이는 10%포인트 높게 올랐다. 2019년 물가 및 실업과 함께 우선순위로 지목됐던 환경 문제가 유권자의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극우정당과 중도우파 정당도 민심에 편승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기후변화 부정도 유럽의 기후위기 대응을 저속으로 바꿔 놓았다.

기후위기 대응은 단순한 경제나 통상 문제가 아니다. 지난 2일 자 이코노미스트지가 주장했듯 미국과 중국간 패권 경쟁의 시대에 그린 딜은 EU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넷제로라는 새로운 규범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다.

비록 이런 야망이 유럽 내부의, 그리고 대외적인 요인 때문에 달성이 쉽지 않다고 해서 포기하는 건 EU의 국제적 위상을 더 떨어뜨릴 뿐이다. EU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린 딜의 유예나 포기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로 보인다.

안병억 대구대 국방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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