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하반기 전세사기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초토화된 다가구 빌라 등 비아파트 시장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정부가 그간 과도하게 풀어준 전세대출과 전세금 반환보증을 축소하고 주거의 한 축인 비아파트 시장을 떠받치는 임대인들에게 연착륙 방안을 제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가구·다세대·오피스텔 등 비아파트 임대인들은 정부가 ‘6·27 부동산 대출 규제’를 발표한 이후 더 긴장하고 있다. 전세자금 대출인 청년 버팀목 대출 한도가 2억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전세 시장이 더 위축되면 기존에 체결한 계약에 대한 보증금 반환 압박이 커진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임회숙씨(59·가명)는 다가구 빌라 임대인이다. 세입자가 ‘에어컨에 물이 샌다’고 하면 달려가 살피고, 전구를 갈아주고, 마당의 이끼를 닦으며 매일을 분주하게 보낸다. 그는 요즘 매일 보증금을 못 돌려줘 범죄자가 되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임씨는 2015년 살던 아파트를 팔고 낡은 다가구 주택을 사들여 식구들과 직접 수리하며 임대업에 뛰어들었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접으면 빌라 관리로 노후 소득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몸 써서 일하면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완전히 ‘적폐’가 되어 버렸죠.” 13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임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임씨가 임대업에 뛰어든 2015년 임대차 시장에선 전세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기준금리가 1%대로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하던 때다. 공사 진행 중 전세를 선점하려는 예비 임차인들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당초 임씨는 원룸·투룸을 잘 수리해 월세로 내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월세는 좀처럼 인기가 없자 방을 하나둘 전세로 내놓게 됐다. “대로변의 큰 오피스텔처럼 번듯한 건물만 월세를 주는 분위기가 계속되더라고요.”
성실하게 관리하고 저렴하게 내놓아 ‘가성비 좋은 집’이란 평판을 얻었던 임씨 건물에 처음으로 ‘공실’이 생긴 것은 2023년 10월이었다. 2022년부터 수면 위로 떠오른 빌라 전세사기 여파였다. 한때 전세만 찾던 세입자들은 이제 전셋집에는 아예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원룸 4개를 두고 반 년여를 속앓이하던 임씨는 지난해 주위 돈을 모두 끌어다가 이 방들을 월세로 돌렸다. 직장에 취업한 자녀들은 신용대출을 끌어와 보탰다. 그러고도 돌려줄 보증금이 모자라자 임씨 부부는 결국 자신들이 살던 집을 세놓고 창고로 쓰던 옥탑으로 이주했다.
‘전세의 월세화’가 빠르게 이뤄지는 동안 많은 임대인들이 임씨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국토교통부 주택통계를 보면 올해 1~5월 전국에서 이뤄진 비아파트(다세대·다가구·오피스텔 등) 전월세 거래의 74.9%가 월세였다. 같은 기간 아파트의 월세 거래 비중(45.6%)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1~5월 기준 서울 비아파트의 월세 거래 비중도 2023년 64.4%에서 2024년 68.6%, 2025년 74%로 가파르게 커지고 있다.
임대인들은 빠른 월세화를 버틸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세사기 이후 불신의 대상이 된 비아파트 임대차 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월세화와 정부의 보증 축소가 올바른 방향일 수 있지만 대비할 출구는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조정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은 “전세사기에 정부 책임도 큰 만큼 임대인들의 주장에 정부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실련은 정부가 무리하게 늘린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반환보증)이 전세사기의 ‘토양’을 제공했다고 본다. 임차인 보호라는 제도 취지는 좋았으나 주택가에 맞먹는 정부 보증이 전세가를 밀어 올렸고, 아파트와 달리 시세 측정이 어려운 비아파트 주택에 피해가 집중됐다는 것이다.

경실련이 HUG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13년부터 2024년까지 HUG 반환보증 가입액의 70%가 아파트에 집중됐다. 다세대·연립 주택의 가입액은 15%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발생해 HUG가 집주인 대신 세입자에게 돈을 갚아준 ‘대위변제’ 액수를 보면, 전체의 절반인 약 5조원이 다세대·연립에 쏠려 있다.
임대차 시장 정상화를 위해 이 보증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는 게 경실련 주장이다. 정부는 2017년부터 100%로 유지하던 HUG의 반환보증 담보인정비율을 전세사기 사태 이후인 2023년 5월 90%로 낮췄는데, 이를 더 낮춰 주택 가격의 60~70% 수준으로 해야 비아파트 전세가의 ‘거품’을 꺼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만기 때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야 하는 임대인들에게 이런 변화는 큰 충격이 될 수 있다. 임씨처럼 여러 개의 임대차 계약을 맺은 임대인은 한 건만 보증금 반환이 막혀도 ‘불량 임대인’으로 등록돼 계약이 줄줄이 막힐까봐 걱정한다.
그런데 임대인들조차 보증 축소에 무조건 반대하진 않는다. 비아파트 시장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희창 전국비아파트총연맹 회장은 “공공보증의 재정 건정성 확보와 보증 지속 가능성을 위해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면서도 “다만 보증금이 이 기준을 초과하는 기존 임대차 계약에 대해서는 월세 전환을 지원하는 정책금융 또는 전환대출 상품 도입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자본 갭투자’로 빌라를 사들인 ‘불량 임대인’이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이들이 떠나도 빌라를 관리할 좋은 임대인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국토교통부가 5년마다 전국 표본 6만10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주거실태조사의 최근 결과(2023년)를 보면,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율은 소득이 높을수록 확연히 높았다. 아파트 거주 비율이 고소득층은 76.8%, 중소득층은 57.4%, 저소득층은 33.7%였다. 저소득층은 3가구 중 2가구가 단독·연립·다세대 주택에 사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아파트값 안정을 위해서라도 비아파트를 향한 냉소와 불신을 해소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채상욱 커넥티드그라운드 대표는 “민간 임대의 신뢰 회복이 너무 어려운 상황이어서 비아파트는 공공이 장기 임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정흔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은 “기존 임대인들의 파산과 경매가 이어지면 임차인들에게도 좋지 않다”며 “선량한 임대인들까지 모두 시장에서 퇴출되면 결국 시장에는 고가의 월세만 남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