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세계 정상 지켜온 페더러
실점보다 눈앞의 ‘한 점’에 집중
1포인트가 쌓여 82% 승률 만들어
무한경쟁 시대 헤쳐나갈 교훈 줘
로저 페더러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다. 테니스 선수로 20여년을 뛰는 동안 줄곧 세계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세계랭킹 1위를 무려 310주(누적) 동안 지키고 있었다. 햇수로도 약 6년이다. 메이저 대회 우승만 20번이나 했다. 날카로운 원핸드 백핸드는 기술을 넘어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22년 은퇴한 페더러는 지난해 6월, 미국 다트머스대학 졸업식 연단에 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회자될 유명한 졸업 연설을 남겼다.
페더러는 “사실 저는 노력 없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 페더러는 테니스를 쉬워 보이게 만드는 대표적인 선수다. 말도 안 되게 멀리 떨어지는 상대의 강한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레리노’처럼 따라가 쓱 미끄러지며 원핸드 백핸드로 받아넘겼다. 그 어려운 걸 해내고도,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땀도 별로 흘리지 않았고, 숨을 몰아쉬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페더러는 “제가 대회에서 몸을 풀 때 편하게 보이니까, 별로 훈련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고 특유의 수줍은 표정을 띠며 말했다.
페더러는 이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근성(grit)의 문제”라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 쉬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를 위해 끈질기게 부딪치고 노력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최고의 테니스 선수였던 페더러의 어쩌면 ‘꼰대’스러운 뻔한 내용이다. 이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건, 페더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반전은 그다음. 페더러의 진짜 교훈은 “모든 열쇠는 딱 한 점(point)”이라는 데 있다. 지금 순간, 따낼 수 있는 딱 한 점이 모든 것의 출발이고, 끝이다. 조금 전 잃어버린 점수 1개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 눈앞에 놓인 한 점을 따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페더러는 커리어 동안 단식 1526경기에서 1251승275패를 기록했다. 승률은 82%다. 10번 중 8번을 이겼고, 그게 누적 합계 6년 동안 세계랭킹 1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한 힘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경기, 모든 승리를 압도적으로 치른 건 아니다. 프로테니스협회(ATP)의 통계에 따르면 페더러가 커리어 내내 따낸 포인트와 잃은 포인트의 비율을 따지면, 54% 수준이다. 세트를 따내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1~2포인트만 더 얻으면 된다. 그 1포인트의 차이들이 쌓여 82%의 승률을 만들었다.
페더러는 “겨우 54%였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포인트에서 절반 조금 넘게 앞섰을 뿐”이라고 말했다. 테니스 ‘3대장’이라 불리는 라파엘 나달, 노바크 조코비치도 포인트로 따지면 다들 54% 언저리에 그친다.
페더러의 교훈은, 그러니까 악착같이 남보다 1점을 더 따내란 얘기가 아니다. 어차피 절반에 가까운 46%는 잃는 점수라는 걸 가슴에 새겨두란 얘기다. 지금 이 순간, 말도 안 되는 플레이로 엉망진창 점수를 내준다 한들, 그것 역시 언제고 잃을 수 있는 1점이란 얘기다. 어차피 절반은 진다고 생각하면, 당장의 실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거꾸로 그 마음가짐이 다음에 따낼 포인트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4%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페더러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은 매 포인트를 이겨서 최고가 아니다. 그들은 점수를 내줄 것을, 질 것을 알고 있고, 그 상황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최고다”라고 말한 뒤 “일단 받아들이고, 필요하면 울고, 그러고 나서 억지로라도 웃어라”라며 그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지금의 실점이, 지금의 실수가, 지금의 어쩌면 실패처럼 보이는 삐끗이 곧장 ‘나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손톱만큼이라도 밀리면 끝이라는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중이다.
페더러가 말했다. ‘반타작’만 해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그 한 포인트가 모이면 불가능해 보이는 중력 탈출 속도 초속 11.2㎞에 이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