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주의 의료와 사회-7]
1980년대 초에 어느 산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야.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가 4남매를 데리고 단칸 셋방에 살았어. 어머니가 보따리에 양말을 이고 다니며 팔았는데 추운 겨울에 길에서 넘어져 양쪽 다리가 부러졌어. 통증이 심하고 걸을 수도 없었지만, 끼니를 거르는 형편이라 병원에 가지 못했어. 4개월째 집에서 고통 속에 계시는 어머니 모습을 어린 딸이 일기에 썼고 그걸 읽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신문사에 알렸어. 신문에 기사가 나가자, 골절 치료에 써달라는 성금이 들어와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수술받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어.
겨우 40여 년 전 일인데 지금 듣기에는 무슨 옛날이야기 같지? 요즘은 다치거나 아프면 당연히 병원에 가서 건강보험으로 치료받는데 말이야.
당시에도 국가 의료보험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과는 아주 달랐어. 1977년에 처음 시작하면서 큰 직장의 직원만 가입하게 했고, 이어서 공무원과 교직원, 몇 년 뒤에 중간급 직장을 포함했어. 그러니까 산골 어머니에게 의료보험이란 운 좋은 사람들의 딴 세상 이야기였던 거야.
어, 거꾸로 된 것 아니냐고? 국가 의료보험인데 어째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만 가입했냐고? 아프고 병드는 건 직장이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지 않냐고? 그래, 중요한 질문이야. 답을 함께 알아보기로 하자. 왜 국가 의료보험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거꾸로’였던 것을 어떻게 바로잡았는지.
먼저 의료보장과 의료보험에 관해 짚어볼게. 비슷하게 보여도 뜻이 조금 달라. ‘의료보장’은 의료 혜택을 누구나 받을 수 있게 보장하는 거야. 그 내용은 ‘공동으로 평소에 돈을 모아 의료비로 사용하기’와 ‘모두가 이용할 의료기관을 운영하기’야. 의료에 쓸 돈을 모을 뿐 아니라 진찰하고 치료하는 병원도 책임져.
반면에 ‘의료보험’은 돈을 모아 의료비로 내주는 것만을 뜻해. 그래서 보장에 견주어 일의 범위가 좁아. 그런데 국가는 단순히 보험이 아니라 전반적인 의료보장을 국민에게 책임져야 하겠지? 그러니까 우리도 의료보장으로 시야를 넓혀서 아까 질문에 답을 찾아가자.
가난한 노동자들의 공동체
약 백년 전, 작지만 중요한 일이 시작되었어. 가난한 노동자가 모여 의료보장의 싹을 틔워낸 거야. 그때는 식민지 시대였는데 일제가 만들어주었냐고? 아니야. 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는 1927년부터 의료보장제도를 시행했지만, 식민지에 대해서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
식민지 노동자의 삶은 고통스러웠어. 부두에서 짐을 싣고 내리기, 바다를 메워 땅을 넓히기, 광산에서 돌을 깨고 나르기 등, 고된 일이 조선인의 몫이었어.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일해도 일당이 너무 적어 온 식구가 노동해야 했어. 일터의 환경은 거칠어서 죽거나 다치는 사고도 끊이지 않았어. 그 악조건을 이겨낼 방법으로 노동자들은 조합을 만들었어.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이미 마을 공동체 두레를 조직해 농사일을 했던 터라, 조합을 만들고 가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웠어. 조합원들은 일당에서 푼돈이나마 회비를 거두고 곤란한 일이 닥치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어.
항구 도시인 함경남도 원산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3천 명이 넘었어. 부두, 운송, 인쇄 등으로 직업별 조합이 있고 조합 간에는 원산노동연합회가 있어 서로 연결하며 협력했어. 연합회가 1928년에 중요한 결정을 해. 모아두었던 기금으로 ‘노동의원’을 세우기로 한 거야. 큰돈이 들어갈 일이었지만, 그만큼 의료가 절실했어. 원산에 공립병원과 기독교계 병원이 있고 개인의원도 더러 있었지만, 의료비가 비싸서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어.
그해 여름, 연합회 회관에 노동의원이 문을 열었어. 경성의전을 졸업한 의사 2명, 조산부 1명, 약제사 2명, 간호부 4명이 있고 ‘치료비를 극히 낮게’ 받는 의원이었어. 입원실 10개 규모로 시작했는데 개원 초기부터 환자로 북적여, 불과 몇 달 뒤에 의사 1명과 간호부 3명을 더 뽑고 시설을 확장해야 했어.
원산노동연합회의 이 사업은 의료보장의 틀에 충실했어. 다 함께 모은 돈으로 의원을 만들어 조합원이 안심하고 의료를 이용하게 한 거야. 덕분에 누구라도 아플 때, 아기를 출산할 때, 치료받고 보호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어. 각 사람이 가난해도 이처럼 공동체의 힘은 약하지 않았어.
그러나 일제가 그냥 두지 않았어.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이 빌미였어. 조선인에게 강요된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때문에 일어난 파업이었는데, 경찰이 핵심 인물을 모두 끌고 가 옥살이를 시키고 일본인 사장들과 합세해 연합회의 역할을 빼앗았어. 결국 총파업은 실패했고 얼마 뒤 노동의원도 문을 닫아야 했어.
운영 기간이 짧았어도 이 사업이 끼친 영향은 컸어. 다른 조합의 본보기가 된 거야. 대구, 경성, 인천, 마산, 신의주, 맹산, 전주 등 여러 곳에서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이 1930년대 후반까지 의료보장 사업을 이어갔어.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
해방을 맞이한 우리 민족이 바란 것은 ‘골고루 잘 사는’ 나라였어. 정당과 단체들이 내놓은 의료정책 또한 ‘의료 사회화, 국영의료’를 중심에 두었어[관련기사 : 해방공간에 움텄던 국영의료론]. 그런데 1947년 말부터는 그와 같은 논의가 아예 자취를 감췄어. 미국과 소련 간에 노골적인 대결이 시작되면서 좌·우파 간의 대립, 그리고 6·25 전쟁이 모든 논의를 억누른 거야.
그러나 논의를 멈춘 건 권력층일 뿐, 사람들은 의료보장을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어. 목포(1951년), 대전(1956년), 부산(1957년), 마산(1957년)에 노동의원이 잇따라 설립되었어. 정부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거나, 마산에서는 탄압까지 했어. 마산 노동의원은 부두 노조가 설립해서 지역 의사들이 하루씩 당번을 맡는 방식으로 조합원과 빈곤층을 진료했어.
그런데 5·16 쿠데타 직후에 육군 방첩대가 노조 대표를 체포해 버렸어. 그는 노동운동가일 뿐 아니라 노동자 자녀를 위해 학교를 세운 교육자였어. 그가 6·25 전쟁 때 있었던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 진상을 밝히려고 활동한 것이 쿠데타 세력에게 못마땅했던 거야.‘혁명재판부’가 그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뒤 노동의원은 운영난에 빠져 문을 닫았어. 마치 식민지 시대로 되돌아간 듯하지?
서슬 퍼런 군사독재 아래서도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갔어. 1968년 부산 시민들이 설립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대표적이야. 이 조합의 중심은 외과 의사 장기려(1911~1995)였어. 그는 이북 출신으로 피난민을 무료로 진료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의료보험을 만들고자 했어. 그와 뜻을 함께한 723명이 조합을 시작한 거야. 담배 한 갑이 100원이던 그때 보험료로 1인당 월 60원을 받고, 조합이 청십자의원을 직접 운영하며, 그 외에 지정 의료기관도 여럿 두어 조합원이 의료를 쉽게 이용하게 했어. 조합원은 의료비의 30%만 내고 진료받았어. 처음에는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1970년대 초 조합원이 2만 명이 되고, 점점 더 늘어나면서 위기를 벗어났어.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 운영하고 소식지에 회계 내용을 전부 공개해 조합에 대한 신뢰가 컸어.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보험료를 때맞추어 납부하며 운영에 협력했어.
청십자조합의 이와 같은 성취는 의료보장을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보여줬어. 정부가 의료보장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던 시기에 말이지.
의료보험이 오히려 불평등을 일으키고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을 내세워 국가 예산의 대부분을 경제와 국방에 썼어. 국민이 의료비 부담에 짓눌리고 폐결핵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매년 수만 명이 사망했지만, 정부는,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아직은 의료보장을 할 때가 아니’라고 고집했어.
정부의 방향을 돌려세운 건 북한이었어. 지금과는 달리 1970년대에 남북한은 사회경제적 수준이 엇비슷해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어. 그런데 유독 의료보장에는 북한이 앞섰어. 모든 의료가 무료이고 출산하는 산모를 국가가 보호해 주는 거야. 그래서 유엔이나 세계보건기구 총회 같은 국제 무대에서 북한이 ‘남한에서는 의료정책이 실패해 많은 인민이 치료받지 못한다’라며 자기들의 성과를 자랑하곤 했어. 남한은 이에 대해 무어라 할 말이 없었지. 그러니 더는 의료보장을 미룰 수 없게 된 거야.
1976년 초에 대통령이 “내년부터 국민의료제도를 시행한다”고 발표했어. 갑작스레 새로운 제도를 내놓겠다는 선언이었어. 그걸 준비하면서 정부는 무엇보다 국가 예산을 쓰지 않는 길을 찾고자 했어. 의료보장의 내용을 채우는 것보다 ‘정부의 부담 최소화’를 중요하게 여겼어. 그래서 나온 것이, 큰 직장만 가입시키는 의료보험조합 제도. 큰 직장은 직원 월급에서 보험료를 넉넉히 거둘 수 있어서 혼자 힘으로 조합을 운영할 힘이 있다는 게 이유였어. 의료보장을 실현할 병원을 새로 세우고 운영하는 일은 다 빼버렸어. 가난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 원산노동연합회나 청십자조합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딴판이었어.
1977년 여름, 전체 국민 중 겨우 8%를 가입시킨 국가 의료보험이 첫발을 떼었어. 가입자 대부분이 대도시에 사는 회사원과 가족이고, 그들에게 이 제도는 큰 혜택이었어. 다달이 보험료를 내기는 해도 병원에 갔을 때 내는 돈이 대폭 줄어든 거야. 입원 의료비의 20%, 외래 의료비의 30~50%만 내면 됐어. 게다가 의료의 값, 다시 말해 ‘수가’가 아주 쌌어. 정부가 당시 의료기관이 받던 일반수가에 견주어 겨우 절반 수준으로 보험수가를 정해버린(!) 거야.
강제로 값을 깎았는데 의료계가 반발하지 않았느냐고? 반발했지만, 쉽게 타협했어. 보험수가가 부적절하더라도 어차피 그건 국가 의료보험증이 있는 8%의 국민에게만 적용하는 것이니까. 나머지 국민에게는 변함없이 일반 수가를 받을 수 있고, 필요하면 더 올려 받아도 되니까.
결국 ‘나머지 국민’에게 짐이 떠넘겨진 거야. 어이가 없지. 예상대로 병원은 일반수가를 더 올렸고, 보험증이 없는 환자에게 의료비는 점점 더 비싸졌어. 앞에서 보았던 산골의 어머니는 그 돈을 낼 길이 없어 뼈가 부러졌어도 병원 치료를 포기해야 했던 거야. 보험증은 불평등의 대명사가 되었어.
민주화의 힘으로 통합을 이루다
불평등이 점점 문제가 되자 정부는 해결책으로 의료보험 확대를 서둘렀어. 먼저 직장 의료보험 조합을 더 만들어 작은 회사도 가입하게 하고 다음에는 ○○시, △△군 단위로 지역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1988년에 농어민이, 1989년에 자영업자가 가입하게 했어.
그러나 ‘전국민의료보험 시대’를 열었다는 건 헛말이었어. 부랴부랴 지역조합을 만들어 국민의 40%를 가입하게 했지만, 이 조합들은 애초에 홀로 설 수 없었어. 직장에 고용되지 않은 사람만 가입하는 터라 노인, 아픈 사람, 저소득층이 많았기 때문이야. 이 조합원들은 보험료를 낼 힘은 적고 의료는 많이 이용해야 했어. 따라서 지역조합에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고 재정에 적자가 날 수밖에 없었어. 적자를 메우려고 보험료를 올리면 아예 내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적자가 오히려 커졌어. 적자에 시달리게 된 조합은 의료비를 내줄 돈이 없어 의료보장 기능을 멈추어야 했어. 젊은이, 건강한 사람, 고소득층이 많은 직장조합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어.
그래서 1988년 농어민 의료보험조합이 시작됨과 동시에 반발이 터져 나왔어. 특히 농민들이 분노해 보험증 반납, 보험료 납부 거부운동을 벌였어. 국민이면 누구나 평등하게 의료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직장과 지역의 칸막이를 없애고 수백 개로 나뉜 의료보험조합을 통합하자고 했어.
그때는 우리가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민주화를 이룬 뒤라 언론이 농민단체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보도할 수 있었던 거야. 덕분에 의료보험 통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널리 알려지고 크게 공감 받았어. 이에 농민단체와 함께 시민단체와 노동단체가 연대해 전국적인 ‘의료보험 통합운동’을 일으켰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지. 하지만 반대도 있었어. 직장인이 지금보다 손해를 본다는 논리였어. 또한 정부가 조합 방식에 집착했어. 그래서 운동은 거의 십 년을 끌었고 그러는 동안 지역조합의 재정 적자는 점점 더 심각해졌어. 결국 1997년에 국회가 법을 개정해 모든 조합을 없애고 하나로 통합하게 했어.
마침내 2000년 여름, 통합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탄생했어. 모든 국민을 아우르는 국가 보험이 그제야 시작된 거야. 1928년 원산 노동자들이 틔워낸 여린 싹이 일제강점기, 의료보장이 필요 없다는 독재, 불평등이 대수롭지 않다는 정권에 이르는 긴 세월을 살아남아 온 국민을 감싸는 나무가 되었어.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의료보장
아까 질문에 답을, 아, 이미 찾았다고? 그리고 건강보험을 그토록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든 걸 알게 돼 뿌듯하다고? 그렇지, 정말 자랑할 만한 역사야.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의료보장’을 기준으로 볼 때 건강보험에는 아직 빈칸이 많아. 이번에 전공의가 병원을 나가버려 일어난 의료대란도 건강보험을 포함한 의료제도의 빈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어. 앞으로 이에 관해 앞으로 하나씩 살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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