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원산지의 덫, 이중 원산지기준의 딜레마

2025-05-13

(조세금융신문=고태진 관세사·경영학 박사)

미국의 중국산 우회 수출 단속, 통상 질서의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미국의 통상정책은 극단적 보호주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중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회피하기 위한 ‘우회 수출’에 대한 단속은 한층 강화되고 있다.

최근 미 관세청(CBP)이 내놓은 판정은, 중국에서 대부분 제조한 제품이 한국에서 마무리된 경우에도 단순 가공에 불과하다면 여전히 중국산으로 간주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판정은 단지 특정 기업이나 국가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글로벌 공급망 전체에 경종을 울리는 구조적 문제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미 FTA에 따른 원산지기준과 미국 국내법상 비특혜 원산지기준은 상이한 판단 기준을 가진다. 동일한 제품이 FTA상 한국산으로 인정받더라도, CBP가 실질적 변형이 없다고 판단하면 미국 국내법상 중국산으로 분류될 수 있다. 즉, 두 체계를 모두 정확히 이해하고 전략을 수립하지 않으면, 기업은 아무리 FTA를 준수해도 예기치 못한 관세와 통관 차질에 직면할 수 있다.

실질적 변형 기준

미국이 적용하는 ‘실질적 변형(substantial transformation)’ 기준은 단순 조립이나 포장을 원산지 변경의 근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제품의 품명(name), 특성(character), 용도(use)가 본질적으로 달라져야만 원산지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준은 최근 CBP의 여러 판정 사례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캐나다산 냉동 빙어를 중국에서 해동하고 손질한 뒤 미국으로 수출한 사례에서 CBP는 “가공의 정도가 미미하다”며 원산지를 여전히 캐나다로 판정했다. 일본산 가리비를 중국에서 껍질만 제거한 사례도 마찬가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베트남에서 여러 부품을 조립해 새로운 진공청소기를 만든 경우엔 실질적 변형이 인정되어 베트남산으로 간주됐다.

핵심 부품의 영향

최근 들어 CBP는 제품의 기능을 실질적으로 결정짓는 핵심 부품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쇄회로기판(PCBA)이다. 스마트폰의 기능 대부분이 PCBA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 해당 부품의 제조지가 제품 전체의 원산지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한국 기업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설계한 제품이라 해도 핵심 부품이 중국에서 조달됐고, 해당 부품이 심지어 미국에서 완성된 최종재의 본질적 특성을 형성한다면, 미국은 이 제품을 중국산으로 간주할 수 있다. 단순 조립, 커넥터 연결, 절단, 연마 같은 가공은 더이상 실질적 변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FTA vs 미국 국내법

많은 한국 기업들은 한미 FTA가 제공하는 관세 혜택을 활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 변형 기준은 FTA상의 원산지결정 방식과는 결이 다르다. FTA는 주로 부가가치 축적이나 세번변경기준 등을 기반으로 원산지를 판단하지만, 미국 국내법은 ‘본질의 변화’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해석 여지가 큰 기준을 적용한다.

이로 인해 동일한 제품이라도 FTA 상으로는 ‘한국산’인데, 미국 세관에서는 ‘중국산’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은 기업의 수출 구조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다.

기업의 대응전략

이러한 복잡한 통상 환경에서 한국 기업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미국의 원산지기준과 과거 판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 제품의 구조와 공급망, 부품의 기능적 위치까지 재검토해야 한다.

둘째, 핵심 부품의 생산지를 전략적으로 분산하거나, 실질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조립 및 가공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미국 CBP의 사전판정(binding ruling)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사전에 원산지판정을 받아두면 수출 후의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다.

넷째, 한중 연결공정에서 ‘가공의 실질성’에 대한 법적 해석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특히 배관 부품의 단순 천공, 전선의 절단 및 단자 연결 등은 실질적 변형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1) Binding Ruling은 미국 관세청(CBP)이 수입자가 요청한 특정 상품에 대해 관세 분류, 원산지판정, 표시 요건 등과 관련된 공식적인 결정을 내려주는 제도다.

공급망 재설계의 기회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단순히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중국산 부품이 ‘녹아든’ 모든 상품, 그 ‘경유지’까지 통제하려 한다.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예외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동맹국의 생산기지를 통해 우회하는 것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은 단지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산업 정책과 공급망 주권을 전면 재구축하고 있다. 여기서 밀리면 관세 문제를 넘어 시장 접근권 자체를 잃게 된다. 따라서 우회 수출에 대한 미국의 단속 강화는 단순한 통관 이슈가 아니라 본질적인 진입 기회의 문제다.

또한 이것은 글로벌 공급망의 ‘윤리성과 책임’을 다시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디서 가장 싸게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 국가가 핵심 기술과 가치 창출의 주체인가가 중요해진 시대다. 한국 기업들은 이 흐름을 민첩하게 읽고, 단기적 생산 효율성보다는 중장기적인 통상 안정성과 규제 대응력을 기준으로 공급망 전략을 재설계해야 한다.

미국의 잣대는 분명해졌다. ‘제품의 정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기업의 경쟁력과 책임,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선택은 기업의 몫이다. ‘국적 세탁’이 아닌 ‘가치 중심’의 글로벌 전략만이 지속 가능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돼야 한다.

[프로필] 고태진 관세법인한림(인천) 대표관세사

• (현)경인여자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현)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 창진원, 경기TP, 인천TP 등 기관 전문위원

• (전)월드클래스 300, NCS워킹그룹 심의위원

• 고려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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