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근 시인(1958년생)
경남 진해 출신으로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함께 읽기> 가끔 아내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고민을 한다. “요즘 세상에 누가 읽을 거리를 찾나요? 다들 볼거리를 찾잖아요. 어렵고 지겹고 재미없는 시에 매달리는 사람 없어요. 당신이 나름 해석 써 보내주니까 마지못해 읽거나 읽는 척하지만...”
하기야 고작 칼럼이나 긁적이는 주제에 시 한 줄 쓰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시를 잡고 늘어지니 스스로도 진 빠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음악가, 화가, 조각가, 소설가, 극작가 할 땐 ‘家’를 붙이는데 시인에게만 ‘人’을 붙였을까? 필자의 생각엔 가장 사람의 일을 파고드는 예술가이기에 '人' 자를 붙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오늘 시에서 ‘종’은 꼭 종 그 자체에 매이기보다는 종을 다른 말로 바꿔 읽기를 권한다. 누군가 가 어디론 가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로 보이니까. 그걸 한 마디로 콕 찍을 필요 없이 말이라 해도 되고, 노래라 해도 되고, 그림이라 해도 되고, 시라 해도 된다.
“종이 울리는 것은 / 제 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제대로 읽지도 않는 시에 생활의 고달픔까지 덤으로 얻으면서 매달리는 그 까닭은... 종이 울리는 목적이 가 닿고 싶은 곳이 있다면 시인이 쓴 시도 어딘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어서 일 게다. 그럼 그곳은?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사실 종의 본질은 소리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세상에 알리는데 있다. 그러러면 조금이라도 멀리 가야 한다. 시인이 시를 씀도 그렇다.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 그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서 잠시 소리가 둥글도록 몸을 굴린다는 표현을 새겨본다. 소리가 둥글다는 인식은 둥글게(갈등 없이 화합하며) 살자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부처님의 자비가 담긴 소리의 모습을 보면서 시인 역시 세상을 둥그스름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종의 사명은 가능한 소리를 멀리 보내려 한다. 다행히 끊어지려 하면 뒤따라오는 소리가 먼 저곳 “조용히 가 닿는 그곳”까지 밀고 간다. 시가 가는 곳도 마찬가지다. 어떤 궁핍함이 오더라도 시인은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시가 살고 싶은 조용히 읊조릴 독자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들어간다. 오늘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기를. 그게 노래든 그림이든 시든 조용히 내 가슴에 안착할 때까지...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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