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의 언어는 일상 언어와 다르다. 직설적인 표현 대신 우회적인 표현을 쓴다. 상대를 직접 비난하기보다는 “우려를 표명한다”는 정도로 한다. 상대와 큰 논쟁이 있었더라도 “솔직한 의견교환을 했다”며 갈등을 최소화한다. 일상 언어가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라면 외교언어는 신중하고 절제되어 있다. 연초 조태열 외교장관의 외교협회 연설은 외교 어법을 따르지 않았다. 장관은 혼돈의 시기에 외교장관으로 짊어진 무거운 짐과 가혹한 현실을 말하다가 눈물을 보였다. 외교가 진영논리의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정치권의 각성을 직설적으로 촉구하고 외교만큼은 초당적으로 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진영논리에 줄곧 흔들리는 외교
본질보다 반대를 위한 반대 많아
외교 만큼은 초당적 대응 필요
가치외교와 실리는 상호보완적
중요한 것은 말의 형식보다 내용이다. 장관이 익숙한 외교 어법을 버린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 엄중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귀환으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그의 ‘미치광이(madman) 전략’은 무엇을 터뜨릴지 예측하기 어렵다. 북·러동맹 부활과 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전 참전은 유례없는 지정학적 위기를 가져왔다. 최근 트럼프는 “모두가 나를 혼돈 그 자체(chaotic)라고 하지만 한국을 보라”고 했다. 전 세계의 혼란은 트럼프가 일으키고 있는데 막상 자신은 한국이 더 혼란스럽다고 한다. 딱히 반박할 말도 없다.
현 정부 내내 외교는 진영논리에 휘둘렸다. 외교에서 이익보다 가치에 중점을 두다가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가 파탄 났다는 비판, 과거를 망각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서둘렀다는 비판, 한·미·일간의 과도한 밀착으로 북·중·러의 결속을 초래했다는 비판 등 진영논리에 의한 비판은 일상적이었다. 외교는 국회와 여론의 지지가 중요하다. 이런 총체적인 비판 속에서 외교가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에는 소인국의 나라 ‘릴리펏’이 나온다. 거기에선 두 당파가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들은 신는 구두 굽의 높이로 상대방과 자신을 구분했다. ‘구두 굽 높은 당’과 ‘구두 굽 낮은 당’이다. 황제는 낮은 굽 정파를 선호하여 정부의 행정부서나 황실에서 결정하는 관직에는 낮은 굽 인사들을 임명했다. 두 당파 사이의 적개심이 너무도 강렬하여 그들은 같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 말도 하지 않았다. 구두 굽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가 사안의 본질이었으나, 거기엔 관심도 없었다. 본질보다 반대를 위한 반대, 한국 외교의 진영논리와 판박이다.
외교에 가치와 원칙을 반영해야 하는 시대적 흐름에서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회고록 『Keeping Faith』에서 왜 가치외교를 했는지 썼다. 70년대 미국은 닉슨 대통령의 탄핵, 베트남전 패전을 겪으면서 국격은 떨어졌고, 국제문제에서 경제적·군사적 개입은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카터는 인권 존중이라는 소프트 파워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카터는 인권문제 제기를 통해 상대국으로부터 다른 분야의 양보까지 얻어내어 가치외교는 실리외교가 되었다. 외교에서 가치와 이익은 상호보완적이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가치가 이익과 결합될 때 외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멋진 외교의 비밀이다.
진영논리를 넘어선 대표적 성공사례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있다. 당시 일본에는 사쓰마번과 조슈번 두 라이벌 진영이 있었는데, 서로를 암살하는 앙숙이었다. 그러나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일본이 풍전등화의 국가적 위기에 빠지자, 사쓰마와 조슈는 사카모토 료마라는 젊은 사무라이의 중재로 정치·군사 동맹을 맺었다. 메이지 유신의 대전환점이 된 삿초동맹(薩長同盟)이다. 막부타도와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적과 손잡는 정치적 대타협을 이룬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탈바꿈했고, 서양세력과 견줄 수 있는 국가로 올라섰다.
2차 대전 후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힘을 합쳐 마셜 플랜을 이끌어내 유럽의 공산화를 막으며 서유럽을 재건시켰다. 당시 정파 간 이념적 대립이 강했던 시기에 야당인 공화당의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는 당과 지역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익을 우선시하는 외교를 지지했다. 그의 말 “정쟁은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우리 정치권이 새겨야 할 명언이다. 외교관 한평생의 끝자락까지 분투하고 있는 외교장관의 충정 어린 눈물이 정치권에 자기성찰의 단초가 되기를 고대한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