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산업, 속도전보다 중요한 실력전

2025-09-10

한국 바이오산업이 '속도전'을 선언했다. 지난 5일 인천 송도에서 열린 'K-바이오 혁신 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신약 심사를 세계에서 가장 짧게 줄이겠다"고 밝혔다. 정부 부처 수장들도 입을 모아 속도와 유연성을 강조했다. 규제 완화, 임상 3상 면제, 식약처 예산 확대 등 가시적 조치도 뒤따르고 있다.

다만 바이오 산업에 지금 진짜 필요한 것이 속도일까. 속도를 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산업에 속도만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지금 한국 바이오가 맞서야 할 것은 시간이 아니라 깊이, 즉 실력의 문제다.

한국 바이오는 지난 10년간 줄곧 '유망 산업'으로 불려왔다. 매 정부마다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혔고 민간 투자도 몰렸다. 하지만 정작 글로벌 시장에서 가시적 성과를 낸 사례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기업이 여전히 기술 도입(License-in)에 의존하고 있고 자체 신약 개발 역량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산업은 늘 '기대감'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실적은 없는데 시가총액은 수조 원, 임상 1상 발표만으로 주가 급등, 실패한 기술이 재포장돼 다시 등장하는 일도 잦다. 투자와 주목은 많았지만 기반 기술력과 임상 성공률이라는 실질적 지표는 따라오지 않았다.

정부는 식약처의 심사 기간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중국, 일본처럼 심사 기간을 단축하는 흐름에 발맞추겠다는 뜻이다. 분명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이것이 산업 전체의 해결책인 것처럼 여겨지는 건 위험하다.

선진국은 규제를 풀기 전에 기업들의 실력부터 점검했다. 중국은 임상 패스트트랙을 시행하면서도 국영 연구기관과 민간의 R&D 연계를 강화했고, 미국은 FDA와 기업 간의 과학적 데이터 기반 협의 구조를 정착시켰다.

반면 한국은 실력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만 앞서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심사 기간을 줄이겠다고 선언하면서, 정작 글로벌 임상 경험, 통계 설계, 허가 문서 역량 등 핵심 기반은 여전히 미약하다.

바이오의약품은 인체에 직접 투여되는 기술이다. 실수가 생기면 그 피해는 기업이나 투자자가 아닌, 국민과 환자에게 전가된다. 실력 없는 기업이 빠르게 허가를 받는 구조는 결국 산업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이 구조의 부작용을 봤다. 일부 바이오기업의 임상 실패, 상장폐지, 내부자 거래, 허위 과장 발표 등은 산업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빠르기만 한 '절차'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품질'이 우선이다.

한국 바이오가 진정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먼저 실력을 키워야 한다.

단기 성과보다 장기 전략이, 규제 완화보다 인력 양성과 기술 축적이 우선이다. 실력전으로 가기 위한 과제로 ▲실패 사례 공유와 재도전이 가능한 생태계 ▲글로벌 임상 설계와 데이터 관리 전문인력 양성 ▲기술보다 실행력 중심의 R&D 평가 시스템 ▲투기성 자본의 유입 차단과 책임 있는 투자문화 정착 등을 꼽을 수 있다.

정부의 속도전 선언은 시작일 뿐이다. 이제부터는 산업이 실력으로 응답해야 한다. 속도는 규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실력이 만들어낸다. K-바이오가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부터 실력전이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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