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가 모든 걸 좌우? 섬모충이 알려준 RNA 역할과 생명공학 혁신[BOOK]

2025-05-09

RNA의 역사

토머스 R 체크 지음

김아림 옮김

세종서적

우리는 종종 DNA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착각한다. 이런 곡해의 뿌리는 여러 곳에 뻗쳐 있는데, 그중에는 소위 생물학의 “중심원리(센트럴 도그마)”도 있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DNA에 유전정보가 담겨 있고, 그 정보가 RNA에 복사되고, RNA에 담긴 정보에 따라 단백질들이 합성된다. 이 단백질들은 생명체의 구성재료가 되거나 생명활동을 좌우하는 각종 효소로 활동한다. 이런 구도에서 DNA는 유전정보를 총괄하는 도서관, 단백질은 현장 작업자인 셈. RNA는 피동적 메모지 역할이 부여된다.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의 구조를 밝혀낸 프랜시스 크릭이 유전정보와 생명활동의 관계를 설파하며 붙인 이름이 “중심원리”. 뉘앙스를 살리자면 ‘핵심교리’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여러 면에서 ‘핵심교리’는 이미 깨졌다. 유전정보가 DNA에서 단백질까지 일방적으로만 흐르는 것도, DNA가 같다고 언제나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 결과 “센트럴 도그마”는 가장 흔하게 관찰되는, 하지만 철칙은 절대 아닌 현상에 붙는 말 정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RNA는 이런 종교개혁의 현장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가끔은 조연이지만, 대체로 주연으로.

지은이 토마스 체크는 RNA 연구가 이끈 이 혁명적 변화의 과정을 회고할 적임자. 30대 중반에 중요한 첫 발견을 해낸 이래, 40여년 동안 활발히 교류하며 실험연구에 종사해온 살아있는 역사다.

발단은 DNA에 단백질 합성과 무관한 부분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었다. 조사해보니 세포핵 내부 DNA에서 바로 복사된 RNA는 그런 부분까지도 그대로 베낀 것. 하지만 단백질을 합성하는 리보소움이 전달받은 RNA에는 단백질 합성 정보만 담겨 있었다. 세포핵 내부에서 갓 복사된 RNA를 부분부분 잘라내고 이어붙이는 편집 작업, 이른바 “RNA스플라이싱”이 일어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당시에는 그런 생화학 반응은 효소가 일으키는 것이고, 효소는 단백질이었다. 어떤 단백질이 스플라이싱을 저지르는지 찾아내는 것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체크의 팀은 연못에 사는 섬모충 테트라히메나로 실험하다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스플라이싱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을 세포핵 내부 추출물 없이도 스플라이싱이 일어났다. 추가실험 끝에 RNA가 스스로 효소 노릇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드니 알트만의 연구팀도 박테리아를 사용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1989년 두 사람은 노벨화학상을 공동수상했다. RNA 조각들이 단백질 효소들처럼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이 책 원제도 '촉매(The Catalyst)'다.

이후의 연구들로 길고 짧은 RNA 조각들이 세포 내 여기저기 존재하며 갖가지 역할을 하고, 종을 뛰어넘어 같은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때 세포 노화를 방지하는 ‘유전자’라고 유명세를 치른 텔로미어, 손상된 텔로미어를 복구하는 텔로미어라제도 체크의 연구진이 테트라히메나로 실험하다가 찾아낸 것이다.

이렇듯 RNA는 생명활동을 조율·매개하고 필요한 정보를 보관·전달하는 역할을 모두 한다. 반면 DNA는 RNA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효소 노릇을 하는 단백질 중에는 RNA 조각과 결합할 때만 제대로 기능하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능성들이 떠오른다. 하나는 원래 생명이 RNA에서 출발했을 가능성. 직접적 물증은 없지만 방증만으로도 가장 유력한 가설로 인정받는데, 주창자는 체크 본인이다. 다른 하나는 RNA 조각들을 잘 이용해 새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 mRNA백신이나 CRISPER 유전자 가위도 RNA가 DNA와 단백질의 역할도 함께한다는 사실을 이용한다. 1970년대 유전공학이 DNA 중심이었다면 요즘 생명공학은 RNA가 핵심적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 책은 현대 생명공학의 뿌리를 엿보는 재미도 있지만, DNA 강박증에서 풀려나는 치유와 해방의 보람이 더 오래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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