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주 내내 국민들 마음속을 시커멓게 태웠던 영남 일대의 산불 참사가 가까스로 잡혔다. 사상자만 70여 명을 헤아리는 최악의 피해에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닥쳐온 재난이기는 했지만 엉터리 대처가 피해를 키운 것은 뼈아픈 지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피해 지역 주민들이 받은 재난문자에는 대피 장소가 명시되지 않았거나 대피 장소가 30분 만에 변경되는 식으로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구형 피처폰을 쓰는 어르신 중에는 재난문자를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피해 지역에 ‘강풍’과 ‘찔끔 비’만 허락한 하늘만 탓할 일도 아닌 듯하다.
현행법상 ‘재난주관방송사’와 해당 방송사를 관리·감독할 방송통신위원회의 처신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정도의 재난이 닥쳤다면 채널을 두 개나 운영하는 재난주관방송사는 적어도 한 곳을 통해 재난방송을 지속적으로 송출하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산불 피해가 커지던 와중에도 10~20분 분량의 짧은 뉴스 특보를 냈을 뿐 드라마와 축구가 줄줄이 편성된 정규 방송을 그대로 유지해 시청자의 원성을 자초했다. 산불 피해가 이 정도로 커질 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재난방송사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신속한 재난방송으로 국민의 생명·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그 역할과 책임을 잊으면 안 된다.
해당 방송사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재난방송을 관리·감독해야 할 방통위는 경북 산청에서 산불이 시작된 지 5일이 지난 26일 방송재난 ‘주의’ 경보를 냈고 그 하루 뒤에야 ‘경계’로 단계를 상향하는 등 뒷북 조치에 급급했다. 산불 참사가 남긴 총체적 난국은 비단 잿더미 현장에만 있지 않았다.
2019년에도 고성·속초 일대를 재난적 산불이 휩쓴 바 있다. 당시에도 재난 상황이 신속하게 전파되지 못한 게 피해를 키우고 실질적 정보 제공이 미흡했다는 반성 아래, 정부 부처 합동으로 재난방송 전반에 대한 시스템 개선을 약속했다. 그런데 5년 사이 달라진 게 없다. 방통위의 올해 재난방송 수신 환경 개선 사업 예산은 전년 대비 거의 반토막 났다. 2024년 10억 원에서 2025년에는 5억 8500만 원으로 줄었다. 편성 규모나 삭감액 규모 모두 지나치다.
자연재해나 사회재난의 규모와 강도가 이전과 달라져 일상화·장기화되고 있다는데 한국의 재난방송 시스템은 이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을까. 의무재난방송을 확대하고 재난방송 실적을 방송 평가에 더 많이 반영하는 대안 등이 나오고 있다. 방송통신발전기본법,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기상법 등에 산재된 재난방송 관리·운영 내용을 하나로 묶어 별도의 특별법을 제정하고 지상파 다채널 방송을 도입해 재난 전문 채널을 운영하도록 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다양한 대안이 거론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을 관리·운영할 주체에 있다. 지금처럼 방송의 공적 가치를 높이는 컨트롤타워가 없다면, 백날 재난방송 시스템 강화를 외쳐도 공허해질 뿐이다.
재난방송사 홈페이지의 시청자 청원에는 공영방송의 의무를 다하라고 촉구하는 글들이 올라와 있다. 이번 산불 기간 해당사의 ‘보도 참사’를 전하는 기사 댓글에도 비슷한 비판이 많다. 재난방송사를 겨냥한 빗발치는 원성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기대가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같은 목소리와 기대에 부응하는 재난방송 거버넌스로 재설계돼야 한다.